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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시콜콜 Aug 28. 2018

사랑을 위한 얼굴들

#049_얼굴

케빈은 인기가 많다. 얼굴이 잘 생기진 않았지만 운동으로 다져진 몸매와 스타일리시 한 옷차림으로 광채가 감도는 느낌이다. 게다 뭐든 잘하니 학과 여자애들에게 매번 둘러싸여 있다. 내가 이기는 거라곤 오직 술뿐. 둘이 자주 한잔 하는데 요즘따라 케빈이 보이지 않는다.


시험 전이라 어디 구석에 처박혀 공부하나 싶었는데 복도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모습을 보니 아닌 모양이다. 푸석푸석해 뵈는 얼굴이 하루 이틀 마신 것 같지 않다. "케빈 얼마나 마신 거니? 상태가 왜 이래?" 방금 마신 듯 술냄새를 풍기며 입을 연다. "루크 안녕, 오늘 출석만 부르고 집에 가야겠다. 수업 끝나면 집으로 와라 술이나 마시자. 안주거리 좀 가져오고." 케빈이 술을 좋아하나 매일 마시는 성격은 아니다. 더욱이 시험 전인데 말이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물어볼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상태를 보니 밥도 제대로 안 먹은 것 같다. "응, 갈 때 도시락이랑 안주할 것 좀 사갈게."


...


집안 꼴이 말이 아니다. 행정병 출신이라 발표자료 하나 만드는데도 각 맞추는 친구인데 집 상태가 이런 걸 보니 분명 무슨 일이 있다. "케빈! 무슨 일이야? 말 좀 해봐." 지금껏 자고 있었는지 널브러져 있던 몸을 일으켜 침대에 기댄다. "헤어졌어." 케빈은 인기도 많고 사귀기도 잘 사귀는데 매번 금방 차인다. "야, 너 또 까였냐? 아효,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걱정했잖아 이놈아. 인기도 많은 놈이 또 사귀면 돼지 금방 죽을 인간처럼 이러고 앉아있냐. 답답하다 답답해."


소주 뚜껑을 따더니 병째 한 모금 마신다. "이번에 정말 헤어지기 싫기도 했지만, 자꾸 차이니 자괴감 든다. 이런 거 자괴감이라 하는 거 맞겠지?" 헤어진 걸 위로해야 하는지 자주 차이는 걸 위로해 줘야 하는지, 갑자기 짜증이 밀려와 속에 있는 말을 해버렸다. "너한테 문제 있다 이놈아 맨날 차이는 게 여자 탓이겠냐? 너 문제지, 술 그만 처먹어" 자존심 센 친구인데 오늘은 고분고분하다. "그래, 나한테 문제 있는 거겠지? 뭐가 문제냐 여자 친구 생기면 정말 잘 해 주는데. 너는 어떻게 오래 사귀냐?" 


케빈이 여자 친구 만나면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없으니 뭐라 말하기 어렵다. 짜증낸 게 미안해서 편의점에서 사 온 도시락과 안주를 풀며 이야기를 건넨다. "케빈, 도시락부터 하나 먹자, 너 혹시 여자 친구 생기면 무한 젠틀맨이냐? 무조건 잘해주는 거야?" 이 놈 강박증 기질이 있어 왠지 연애도 각 맞춰할 것 같다. "여자 친구인데 당연히 잘 해줘야 하는 거 아냐?" 예상대로 인 듯하다. "밀당 모르니 밀당?" 하찮은 듯 나를 보며 입을 연다. "야, 난 그런 거 싫다. 좋으면 좋은 거지 그딴 걸 왜 하냐."


"순진한 놈, 인기 많으면 뭐하냐? 케빈, 밀당이 말이야 사랑 가지고 장난치는 게 밀당이 아니야 일종의 심리학이라고. 누가 공대생 아니랄까봐 주는 만큼 나오길 바라고 있냐? 사랑은 x, y로 정의할 수 없다고." 같은 학과지만 심리학을 복수전공 중이라 우쭐대듯 꺼냈는데 의야하다는 듯 답한다. "공대생이 뭐 어때서? 너도 공대생이잖아. 복수전공이 진짜 전공도 아니고 뭘 아는척을..." 대꾸할 필요 없을 것 같아 말을 잘랐다. "케빈, 사람은 돈으로 완벽한 만족을 얻을 수 없어, 왜 그런 줄 아니? 사고 싶은 걸 손에 쥐었다고 생각이 드는 순간 다른 욕심이 발동되기 때문이야." 


술잔에 술을 따라주며 답한다. "근데 뭐? 그게 연애랑 뭔 상관인데?" "음, 너 우리 과 여자애들한테 인기 많잖아? 왜 그런 줄 알아?" "학점 좋고, 운동 잘하고 뭐 그런 거 아니야?" "그렇지 맞아, 놀기도 잘 놀잖아? 그 관계들을 잘 엮어봐, 준수한 것 같은데 잘 놀아, 반전 매력이라고 하지? 넌 그런 의외성의 모습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어. 그거 엄청난 매력이다. 그래서 누굴 만나든 금방 사귈 수 있는 거야." 배가 고팠는지 도시락을 까면서 대꾸한다. "근데 왜 이러냐고 매번." "두 가지 정도 떠오르는 게 있는데 첫 번째는 네가 네 매력을 너무 빨리 소진해 버리는 거, 두 번째는 사귀면 너무 잘해주기만 하는 거야." 


도시락을 마시듯 먹으며 대꾸한다. "첫 번째는 너 말이 맞는 것 같은데, 잘 해주면 감사해하면 될 것이지, 잘해주는데 왜 헤어지는 거냐고. 여자들이 이상한 거 아냐? 아직 정신 못 차려서 그래 나이 먹으며 다시 나 같은 남자 찾을 거라고." 그런 여자가 있긴 하겠지만 쉽게 찾아질 리 없다. "아까 돈으로 만족을 얻을 수 없다고 했지? 여자가 구매해야 할 물건이 너였다고 생각해봐 처음엔 네게 호감이 있어서 사귀었겠지만 막상 만나고 나니 자기 물건이나 다름없는 네가 더 이상 매력적이게 느껴지겠니? 연애도 전략이라고 전략. 끊임없이 너를 욕망하게 만들어야지." 미간을 찌푸리며 답한다. "그래서 뭐 어떻게 하는 건데."


욕망이라는 단어에 이질감이 있나 보다. "순진하긴, 욕망이란 단어에 이상한 의미 부여하지 말고 잘 들어봐. 여자는 아주 많은 감정을 가지고 있어, 네가 공대생이라고 다른 사람 감정도 몇 개 안되리라 생각하면 안 된다. 사람은 감정의 종류가 아주 많다고, 너처럼 좋은 거 싫은 거 짜증 나는 거 이런 식으로 분류하지 않아. 그래도 자괴감이란 거 하나는 이번에 배워서 다행이다." 케빈이 소맥을 만들어 내 앞으로 준다. "이거나 마셔라."


한잔 들이켠 후 말을 이어나갔다. "한 마디로 정리 해 줄게, '휘몰아치게 해라' 여자 친구의 수많은 감정들을 휘몰아치게 해 주란 말이야 사랑, 슬픔, 분노, 간절함, 웃음, 질투, 시기. 수많은 감정들을 하나씩 맛보게 해 주라고. 그렇게 매일 고분고분 받들어 주지 말고. 너 다른 여자애들한테 장난도 잘 치고 가끔 짓궂기도 하잖아? 근데 여자 친구 한테는 안 그러지? 그저 잘 해 주기만 하지?" "어, 왜 그러겠냐 진짜 좋아하는 여자라면 계속 잘해줘야지" 다시 술을 채운다. "너에게는 밀당이라는 단어 자체가 부정적인 것 같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봐 개그 프로그램에 한 인기 있는 코너가 오래 유지되는 방법이 뭘까? 당연히 매번 신선한 소재를 선보이는 거겠지? '오늘도 같은 레퍼토리겠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반전을 선보이는 거잖아? 바로 그게 밀당이야. 사람은 그런 의외의 현상에 흥미를 느껴. 창의적이어야 해, 고로 사랑도 창의적이어야 하는 거야."


다시 한 모금 들이킨다. 이제 나도 서서히 술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듣고 있던 케빈이 짜증내며 말한다. "아, 해야 할 것도 많은데 왜 연애까지 그래야 하냐?" 그렇긴 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남자는 본능적으로 여자를 원하는데 어쩌리. "싸이 노래 중에 연예인이라고 있잖아. 배우도 있고 가수도 있고 개그맨도 있는데 왜 연예인이라고 했겠니? 연예인은 다양한 것들을 포함하잖아. 개그맨이 돼서 코믹도 할 수 있고, 배우가 돼서 멜로도 할 수 있고, 가수가 돼서 감동도 줄 수 있고 말이야. 너도 다양하게 해줘야지 맨날 똑같은 멜로 찍는 배우는 별로 매력 없다. 그거 어려우면 너 평생 까이고 다니는 거야."


말없이 연거푸 몇 잔 마시고 케빈은 힘들다는 듯 누운 채로 말한다. "그러면 여자가 끊임없이 날 욕망하게 해라? 그 방법이 끊임없이 날 바꿔라?" 이야기가 길었는지 배가 고파 음식을 입에 넣은 채로 대답한다. "그게 수학처럼 그렇게 정리 가능할는지 모르겠지만 대충 느낌은 알겠지?"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엎드려 잔다.


...


나름 위로가 되었는지 무사히 시험기간을 마치고 근처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루크, 그거 다시 한번 말해봐 어떻게 해야 한다고?" "음, 내가 너랑 사귀어 보지 않아서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어. 그런데 말이야 너랑 헤어지자고 말하는 여자들 조차도 이유는 잘 모를 거야. 지난번 이야기는 나도 그저 추측한 거지." "그러니까 그 이야기 다시 해봐." "내 생각에 너는 매력을 너무 빨리 소진하거나 너무 잘해주기만 해, 나처럼 2년이 넘어가기 시작하면 그런 생각 필요 없지만 적어도 1년은 긴장감을 잘 유지해 줘야 하거든. 여자가 너를 완벽히 가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만들어야 해. 완벽히 너를 가졌다는 건 마치 개그 코너에서 다음 행동을 다 외고 있다는 거랑 같거든. 그러니까 예측하지 못한 즐거움을 던져 주란 말이지. 너 할 줄 아는 거 많잖아? 그것들 잘 이용해서 다양한 얼굴을 선보이라고. 그렇다고 순식간에 소진하지 말고 적당히 적당히."


케빈이 하늘로 솟을 듯 벌떡 일어나며 말한다. "너처럼 오래 사귀려면 심리학 배우면 되는 거냐? 난 어려워서 못하겠다. 시험 끝났으니 술이나 마시자." 따라 일어나며 대꾸한다. "밀당이라는 단어를 사랑 가지고 장난친다고 생각하지 말아, 사랑을 돋우는 묘약이라고. 바람둥이 같은 애들이 밀당, 밀당해서 그런 거지 그게 필요 없는 건 아니란다. 인생을 배우려면 수학만 잘 풀지 말고 사랑을 배우란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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