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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시콜콜 Nov 13. 2018

수단으로써의 수단

#072_수단

"루커스, 이것 봐 다음 달에도 일정이 가득하다고."


다음 달 여행 가자고 했더니 스마트폰 일정관리 어플을 내미는 케빈, 대학 시절엔 다이어리에 적더니 요즘은 어플에 꼼꼼히 저장한다.


"알록달록 뭐 많기도 하다. 그거 다 회사일이니?"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여기저기 일이 많아."


초록색은 회사일 같고, 주황색은 집안일, 노란색은 친구들, 파란색은 자기 관리... 무지개 빛 찬란한 일정을 과연 소화하기는 할까라는 의문이 든다. 그보다 문제는 일정관리를 위해 소비되는 시간이 지나치게 긴 것이다. 다이어리에 시험일정 정리하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1시간 씩이나 허비해대는지.


"거기 있는 일정대로 하기는 하니?"


"아니 뭐... 가급적 하려고는 하지."


"내가 보기엔 안 할거 같은 것도 많은 거 같은데? 회사일 이거는 네가 하는 거 아니잖아 너 팀장이 해야 할 일 아냐? 여기 독서하기도, 너 책은 샀어?"


"아니, 사야지."


목수에겐 좋은 공구가 프로그래머에겐 좋은 컴퓨터가 그리고 요리사에겐 좋은 칼이 있으므로 그들의 능력은 배가 된다. 반면 아무리 좋은 칼을 들어도 요리능력이 부족하다면 좋은 요리사가 될 리 없다. 마찬가지로 요리사에게 칼 가는 능력은 부가적인 기술일 뿐 결코 주가 될 수 없다.


"내가 보기에 넌 일정관리 컨설턴트가 딱 맞는 직업일 것 같아."


"어! 맞아 나 그런 거 정말 좋아하잖아."


내가 비꼬는 건 모르고 또 좋다고 저러다니. 설사 일정관리 컨설턴트를 한다 해도 일정관리 컨설턴트를 위해 또 일정관리를 하고 있을 케빈 모습이 눈에 선 하다.


"그런 말이 아니고! 해야 할 일을 해야지 왜 수단이 주가 되어버리냔 말이야, 답답하다 답답해. 너 대학교 때도 그렇게 열심히 적기만 하고 성적은 안 나왔잖아, 계획만 세워서 뭐 할 건데. 그리고 오늘 우리 만나기로 한 거, 너 어플에 이렇게 저장해 놓고도 내가 아침에 어디서 만날 건지 물어봐서 알았잖아."


"에이 가끔 그럴 수도 있지."


"가끔이 아닌 것 같은데?"


본인도 알면서 그러는 건지, 진짜 모르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이건 뭔가 잘못된 행동임은 분명하다. 고작 일정 정리에 시간을 허비하다니. 속상하지만 더 이상 말해봐야 잔소리만 될 테니 친구는 그냥 친구로서 받아들여야겠다며 흥분을 삭힌다.


"아이고, 말해서 뭐하냐. 뭐 먹을 거냐 밥이나 먹자"


고사성어나 명언 따위 것들을 싫어 하지만 이럴 때면 주객이 전도된다는 말이 절로 튀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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