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만든 각막

백수의 탄생 4화

by 감정수집

백수생활 청산 3개월째. 몸도 마음도 점차 안정을 찾아간다. 백수라 당연히 어딘가 아프고 곯아 보여야 하는 건 아니나 나는 어찌 그토록 앓았는지.


장르의 발생 - 백수는 아프다


나는 누구인가

너무나 진부한 질문, 그렇지만 누구도 풀지 못한 문제. 나 역시 답을 구했을 리 없다. 다만 스스로에게 조금 더 다가섰을 뿐. 몸도 마음도 흔들림이 컸지만 견디고 견뎌서 얻어낸 소중한 선물이다.


나 역시 인간이었다. 즐겁고, 슬프고, 행복하고, 사랑하고, 두려워하고, 힘들어하는 감정을 지닌 동물인 것이다. 나에게로 다가섬은 이렇게 시작됐다. 억압하고 통제하며 껍데기 씌워 나를 만들어온 지난날들이 비로소 백수의 시간으로 부서졌다. 억눌렸던 감정들이 일 순간 뻗쳐 나오며 나를 지배한 것이다.


정신병이란 건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다 생각했으나 오산이었다. 나도 다른 사람과 다를 것 없다는 걸 알고서야 이해가 간다. 일순간 뻗쳐 나온 감정이 나를 완전히 지배하고 마음을 넘어 신체까지 영향을 주는 수준에 다다라서야 정신적 타격이 결코 쉽게 볼 일이 아닌 걸 알았다. 아버지들이 퇴직 후 우울증에 걸리는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의사 선생님은 "건강했을 때는 몸이 받쳐줬을 텐데 지금은 정신과 몸이 둘 다 무너졌어요."라는 소견이다. 그도 그럴 것이나 지나치게 자기 확신이 강한 것도 한 몫했으리라. 공대생은 이래, 미대생은 저래, 인문대생은 요래 라며 구분 짓은 그런 것에서 공대생이 가진 하나는 분명 '고집'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의 일에 관한 자신감이다. 나 역시 그랬다. 살면서 이루고 싶은 것들을 이뤄봤기에 자기 확신이 강했고, 이런 류의 자기 확신은 감정 따윈 소용없는 거라 여겼다. 좋은 감정은 오롯이 이뤄야 하는 감정, 성공해야 하는 감정이었고 짜증, 슬픔, 아픔, 두려움, 망설임의 감정은 나쁜 감정이다. 슬픔이 자아내는 기쁨, 기쁨 속에 감춰진 두려움은 그저 이상한 감정으로 회피해야 할 감정이었다.


강함은 휘지 못하고 부러진다 했던가. 백수생활 도중 약간의 생채기 사이로 수많은 감정이 거침없이 들이닥쳤다. 어떨 땐 하나씩, 하지만 대부분 묘하게 엮여 들어왔다. 받아들이기 힘들어도 거부하고 싶어도 가장 약한 부분을 찌르고 주입됐고, 결국 부러졌다. 부러진 가지들이 황량히 뒹굴렀다. 스스로의 인생, 심지어 세상까지도 바꿀 수 있다 자신했던 한 청년이, 자신의 심장박동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제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얌전히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것뿐.


2개월은 난생처음 맞는 지옥이었다. 그토록 몸이 아팠던 적 없었고, 그토록 가슴 아팠던 적 없었다. 눈이 아닌 온몸으로 눈물이 흘렸고, 10킬로 빠진 살 만큼이나 마음이 건조해졌다. 양 손 모아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은 메말라갔다.


유일하게, 글. 글이었다. 그 좋아하던 무엇도 손대지 못했지만. 오직 글은 쓸 수 있었다. 배운 적도, 잘 쓰지도 못하는 글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회복된 것, 완벽히 회복됐다고 볼 순 없으나 어쨌든 좋아지게 된 데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내 상태를 알고 위로해주는 도움은 아니었지만 그 자체로도, 그저 시간을 같이 보낸다는 것으로, 몇 마디 글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내겐 큰 도움이 됐다. 이것들은 간접적인 도움이랄까? 당연히 직접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도 많았다. 내 모습을 보고 목소리로 위로해 준 사람들, 내 글을 보고 상태를 꿰뚫어 보는 사람들. 그 모든 이들이 회복하는데 도움을 줬다.


다시 2개월쯤 지나고 많은 것이 바뀌었다. 들이닥쳤던 감정에는 이기심, 욕심, 질투, 시기 같은 것들도 있었는데 대부분의 감정이 생겨났다기 보단 이미 존재했지만 억압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과 동료들과의 생활에서 불쑥불쑥 나왔을 테지만 나도 모르게 막아왔던 질투와 시기심들을 말이다. 이젠 느끼고 제어할 수 있다.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겨우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심지어 이젠 자연스레 풀어내기까지 한다. 능청스레 솔직한 감정을 웃으며 공유하기도 하니까.


어쩌면 회복했다기보다 감정을 다룰 능력이 쌓였다고 보는 게 좋겠다. 이름조차 붙이지 못할 해괴한 감정들에서 어찌 도망치고, 회피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다룰 수 있다고 보는 게 좋겠다. 사실 아직도 가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찾아오지만 통제할 수 있다.


나를 나락까지 끌고 간 감정들, 아프게 했지만 단 한 번도 원망한 적 없다. 지금 글을 쓰며 돌이켜보는데, 내게 그것들이 왜 들이닥쳤냐고 한탄한 적은 없었다. 일렀을 뿐이다. 인생에 반드시 닥쳐야 했을 것들이 조금 빠르게, 또 미리 겪어야 했을 것들을 느리게, 한 시점에 밀집되어 들어온 것뿐이다.


의도치 않게 닥쳤으나 반갑고 기쁘다. 마음이 만든 각막은 이전과 다른 세상을 보여주니까. 그리고 잘 이용하고 싶다. 감정들을 잘 쓰고 싶고, 잘 활용하고 싶다. 친구들에게 부모님에게 그리고 언젠가 연인과 나누고 싶다. 중천에 떠 있는 태양처럼 따뜻한 심장을 가진 사람으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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