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한 자신을 대면하는 일
"형, 일 그만둔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불안해서 못 쉬겠어. 여자 친구도 더 쉬라는데 왜 마음이 편하지 않지?"
아침 일찍 걸려온 전화는 지난 한해를 떠오르게 했다. 우리는 왜 쉬는 것이 불안하고 힘들까? 졸린 출근길과 피곤한 퇴근길 쉬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살면서도 왜 주어지면 누리지 못할까?
삶의 경계에서 맞이한 '틈'
내 인생에 가장 긴 시간 휴식을 가진건 작년이다. 4월에서 8월이니 5개월을 쉬었는데, 사회생활 시작 후 한 달 이상 일 없이 지낸 건 처음이었다. 정확히 사회생활을 접은 건 아니지만 수입이 발생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 기간을 나는 틈이라 부른다. 무엇과 무엇 사이의 틈. 꼭 크지만은 않다. 하나가 끝나고 또 하나가 시작되기 전의 틈, 책과 책 사이의 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틈, 어제와 오늘 사이의 틈, 신호등을 기다리는 동안의 틈, 집과 직장 사이의 틈... 그 틈은 도처에 깔려 있지만 느끼기 어렵다. 꾹꾹 눌려 채워진 쓰레기 봉투 마냥 부푼 일상이 작은 틈 마저 매워버리니까. 나 역시 그 틈을 모른채 살았다. 나름대로 여유있는 삶이라 생각했건만 거대한 틈을 맞이하고야 깨달았다. 한 번도 온전히 받아본 적 없다는 걸.
긴 틈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때면 하는 말인 "요즘 아무것도 안 해요." 라는 문장이 그리도 낯설고 따가울 수 없었다. 35살에 쉬는걸 좋게 보는 문화는 아니잖는가? 쉬고 있다는 말이 스스로를 불안하게 했고, 불안함은 나를 끝없이 위축시키며 쪼그라들게 했다. 만신창이가 되고서야 눈치를 주는 제공자가 자신임을 알아챘다. 정신적 압박이 몸으로 드러나는 수준까지 다달했다. 쓰지도 않는 목에 성대결절이 오고, 아무 원인도 없이 10킬로 씩이나 빠졌다. 병명도 없고, 검사해도 원인을 찾을 수 없었는데 분명 정신병이었을 거다.
사실 아직도 가끔 증세가 온다. 어딘지 모르는 신체 가장자리에서 검은 기운이 날카롭게 들이닥친다. 빠르지도 않게 아주 천천히 밀려 오지만 밀어내지 못한다. 검은 기운에 내 몸을 반쯤 빼앗기면, 콕콕 쑤시면서 몸이 아프고, 엄청난 두통에 잠도 잘 수 없다. 여느 감기몸살보다도 훨씬 고통스럽고 아프다. 원인도 없고, 약을 먹어도 해결되지 않음을 알기에 더 고통스럽다.
한 번도 완전한 적 없던 나
아픈 이유는 온전히 나다. 크게 벌어진 틈 사이에 머무르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댔던 거다. 난생처음 맞이한 틈은 황량하고 낯설고 거칠었고, 매우 춥고 또 어떤 날은 아주 뜨거워 한 숨 들이켜면 내장이 녹아내렸다.
완벽한 자유, 나만의 시간을 얻었음에도 누릴 수 없었다. 나는 불완전했으니까. 내가 나라는 사람을 만들 땐 항상 무엇에 기댄 채였다. 온전히 나 스스로 세상에 서 본 적이 없었다. 성인이 된 후 학비와 생활비 전부를 스스로 해결했음에도, 소위 말하는 자수성가를 했지만 그건 스스로 선 게 아니었다. 자수성가라는 타이틀에 기대어 나를 만든 거고, 직장의 이름에 기대고, 일에 기댄 채 나를 만든 거다. 허술한 구석이 있어도 기대면 됐다. 부족함은 없었다. 나라는 존재는 이미 꽉 채워져 있는 상태고, 채워진 것을 잘 조합하고 수정함으로써 더 좋은, 더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쌓는건 어려웠지만 깨지는 건 한 순간이었다. 거대한 틈을 맞이하자 여태껏 기댄 모든 기둥은 사라졌고 나는 완벽히 신생아가 됐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어떤 영향도 간섭도 없는 5개월의 공간 속에 걸음마를 배우듯 서는 것부터 시작했다. 내가 무얼 좋아하고 무얼 하고 싶은지부터 고민했다. 35년 평생 내 업이라 생각했던 것들을 뒤집어야 했다. 단 한 번도 손에서 놔 본 적 없는 것들을 버려야 했다. 하고 싶던 것, 좋아하는 것, 재미있어하는 것... 누군가 말한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문장처럼 모든 걸 의심하고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노력했다.
내가 원했던 것이 진정 내가 원했던 것일까?
나는 어려서부터 좋은 사람이 되길 바랐다. 좋은 자식, 좋은 친구, 좋은 남자 친구, 좋은 형, 좋은 동생. 힘들지 않은 척, 괜찮은 척했다. 인간관계엔 언제나 뒷전이어서 내 감정, 내 마음은 좋은 사람이라는 감옥에 가뒀다. 어느 인간관계에서도 동등하지 못했다. 한데 그 좋은 사람이라는 기준은 내 것이 아니었다. 내 안에 있지 않았다. 싫어도, 짜증 나도, 힘들어도 좋은 척했던 모습들은 모두 주변으로부터 강요됐던 거다.
학교, 직장, 사회생활까지도 나는 '좋은'이라는 틀에 갇혀있었다. 좋은 친구가 되려, 좋은 학생이 되려, 좋은 동료가 되려 스스로를 억압했다.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한 건 아니다. 부모님은 언제나 선택권을 주셨다. 하나 그 원하는 선택 자체가 '좋은'이라는 틀에 갇혀있던 거다. 게다 내가 선택한 삶이라는 오판이 확신이라는 오만까지 남겼다. 단 한번 본능적이지 못했으면서 스스로를 완벽히 제어할 수 있다 확신했다.
내가 원했던 것이 진정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님을 알면서 불완전한 나를 조금씩 받아들였다. 확신 가득했던 과거를 반성했다. 꿈을 빙자로 자학했던 과거에 사과했다. 스스로에 대한 미안함과 반성이었다. 받아들임으로 불안감이 차차 이완되고 사그러 들었다. 한동안 괴롭히던 두통이 사라지고 잠자리도 편안해졌다.
인간인 이상 겪어온 삶으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울 수 없지만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가능성이 있다. 과거로 학습된 현재일지라도 다른 선택이 또 다른 내가 되도록 밀쳐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어느 것으로도 강요되지 않는 내가 나를 미래로 밀쳐내기 시작했다.
완벽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
깨달음? 거창하지만 적절할 것 같다. 깨달음의 순간이 일순간은 아니었다. 스스로를 미래로 밀쳐내며 나는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집에 지인들 초대하는 걸 좋아하는데, 많은 이들이 다녀갈 때면 꼭 무언가 하나씩 망가진다. 주로 컵이 깨지는 편인데, 그날도 역시 컵이 깨진 터였다. 다음날 아침 숙취의 영향으로 바로 치우지 못한 채 의자에 앉아 깨진 컵을 바라봤다. 한참 바라보자 즐겁다는 생각이 들며 동시에 소름이 돋았는데, 과거의 모습과 너무 달랐던 이유다. 한때는 정리되지 않은 공간에서 잠들지 못할 만큼 강박이 있었다. 내가 원하는 위치에, 문서는 내가 원하는 레이아웃으로, 일은 정해진 일정에 딱 맞추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 누가 내 집에서 컵을 깼다면 무척이나 속상해했을 것이다.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껍데기 때문에 싫은 티는 못 냈을 거지만 분명 마음은 상했을 거다. 한데 즐겁다고 생각하다니.
나는 불완전함을 받아들였다. 세상 모든 게 불완전하고 무엇보다 내가 가장 불완전하다. 셀 수 없이 많은 불완전한 선택으로 내가 됐고,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완전 속으로 나를 밀어내야 한다. 확신은 그저 합리화일 뿐이다. 깨진 컵을 보며 즐겁단 생각이 든 이유가 바로 이거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원망하는 건 스트레스만 가져온다. 한데 세상에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건 얼마나 있는가? 생각을 바꿔보면 이렇다. 원하는 대로 되는 인생은 무슨 재미가 있는가? 예상치 않게 깨진 컵이 사건을 만들었고 우리는 사건에 휘말렸다. 일상에는 더 많은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이 발생한다. 그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이 얼마나 많은 감정을 자아내느냔 말이다. 아무리 웃긴 개그 프로도 질리기 마련이다. 삶도 그렇다. 아무리 좋은 것도 질린다. 불완전한, 예측할 수 없는 삶이 즐거움을 자아내는 것이다.
불완전을 인정했다
주변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완벽을 요구한다. 젊으니까, 남자니까, 여자니까, 그 나이에는, 그때는... 눈빛으로 행동으로 그리고 스스로의 마음속에 내재된 악마들로부터 스며 나와 대적할 수 없는 아픔을 남긴다. 소리는 뚜렷하지도 않다. 강요의 속삭임은 언제나 달팽이관 언저리에 머물러 귀를 막아도 차단되지 않는다.
완벽성을 무너트려야 했다. 젊지만, 남자라도, 여자인데, 그 나이지만, 그 때라도... 고쳐써야 했다. 그리고 문제의 ‘좋은’이라는 걸 깨 부숴야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쉬던 날들, 앞으로에 대해, 먹고 살 일에 대해 걱정하는 건 당연하다. 하나 잠시 쉬어도 된다. 그 잠시 동안 굶어 죽지 않으니까.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쉰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자신 스스로 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더 많이 느껴야 한다. 자신의 불완전에 대해 세상의 불완전에 대해.
주변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완벽을 요구하지만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다. 우리는 불완전하다. 불완전 하기에 즐거움이 있고, 행복이 있다. 완벽성 앞에 즐거움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 또한 예측 불가능하다. 완벽한 경제, 기술, 산업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불완전 속에 엮어 불완전한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게 인간이다. 나는 스스로의 불완전을 인정하고 다시 나를 만들었다. '좋은 사람'이라는 틀을 깨고, 언제든 흐트러질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걸 받아들였고, 삶은 더 즐거워졌다.
불완전한 자신을 대면하는 일
주입된 삶은 완벽을 강요하고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걸 철저히 차단했다. 또한 그것이 본모습이라 착각했다. 주변으로부터의 굴레를 한 번도 벗어나 보지 못했으면서 스스로의 의지로 서 있다고 착각했다. 거대한 틈을 맞이하고야 두려움에 떨고, 불안에 소스라쳤다. 난생처음 맞이한 자유를 누리지도 못한 채 스스로를 쥐어짰다. 진짜 자신을 찾아야 했다. 강요된 무엇이 아닌 오직 자신의 선택으로만 이루어진 나를 찾아야 했다. 그 시작은 불완전한 나를 받아들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