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감정수집

공허함에서 나를 구하다

세상 모든 감정을 느껴보고 싶다

by 감정수집

동일한 패턴의 시냅스가 자주 사용되면 전류의 세기가 강해지고 장기기억이 된다. 전두엽 어딘가의 활성화로 만들어질 공허함이란 놈도 겪으면 겪을수록 강해지는 셈.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 아닐까요? 옆에 분은 공허함을 잘 모르겠다고 하는데 말이에요. 제 생각엔 모른다기보다 ’이건 이상한 감정이네’ 라며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내는 것 같아요."



공허함.

밖에서 배움을 받아오는 유형, 속에서 배움을 만들어내는 유형이 있다 하더라. 한쪽으로 치우쳐진 형태는 없다. 어느 성향이 강하냐에 달려 있을 뿐. 나는 후자 쪽이다. 비유하자면, 내가 책을 좋아하지만 많이 읽는 것보다 한 구절이라도 오래 곱씹는 걸 더 좋아하는 것처럼.


궁금해하지 않았으면 될 것을 하필 궁금했다. 흘려보내도 됐을 것을 괜한 곱씹음으로 키워냈고, 이젠 원하지 않아도 머리를 내밀며 가슴을 죈다.


언제나 사람과 맞닿아 있던 고등학교 시절까지 놈은 잠복해 있었다. 그것이 머리를 내민 건 서울로 간 20살, 혼자인 시간이 많아지면서다. 학생회, 동아리, 친구들. 활발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저녁은 어두웠고, 주말엔 쓸쓸한 바람이 일었다. 미처 몰랐다. 내 속에 그런 건조함이 숨어있으리라곤. 그것만이 아니라 외로움, 고독함, 쓸쓸함 그리고 향수까지 다양했다. 가슴 아닌 말로 어찌 구분되겠냐만은 그중 공허함이란 놈이 특히 강했다.


'관계'에서 '혼자'인 환경으로 바뀌었을 때 놈은 가장 강하게 뚫고 나온다. '관계'의 환경은 다양한 이들과의 엮이는 시간이다. 반대로 '혼자'인 환경은 외부와 단절되는 시간이다. 공허함이 매번 같은 패턴으로 찾아오진 않지만 주로 '관계'에서 '혼자'인 환경으로 이동한 직후 가장 많이 출현한다. 공허함이 강할 땐 방금까지 겪은 모든 시간이 허상 같다. 나조차 허상이어서 연기처럼 날아갈 것 같다. 숱한 경험에도 아직 세월이 부족한가 보다. 매 순간 기회를 엿보며 빈틈을 노리는 놈이 아직 버겁다.



도망.

어떤 감정인 줄 몰랐던 처음엔 도망이 어렵지 않았다. 가벼운 활동으로 쉽게 빠져나갈 수 있었으니까. 아직 학습되지 않았으니까. 글을 쓰기 시작한 후 감정들을 더 자세히 알아보려던 노력이 문제가 됐다. 단순했던 감정의 종류가 복잡하고 다양해졌고, 더욱이 마음의 병이 실제 신체에 영향을 주기까지했다. 그때부터다 빠져나가는 일이 더 이상 쉽지 않게 된 것이. 가장 큰 문제는 도망쳐야겠다며 마음먹는 순간 그것은 이미 문턱을 넘어 선 채라는 것이다.


신체에 영향을 받을 만큼 큰 감정을 받아내자 시냅스는 한 번에 기억해 버렸다. 반복 학습으로 기억이 형성되기도 하나 자극의 강도가 강하면 한 번에 남기도 한다. 나는 내 아픔이 기억된 경로를 그리 추측한다. 세밀한 감정들을 느끼고 싶은 노력이 원인이었다면, 거대히 다가왔던 한 번의 고통이 공허함을 완벽히 학습시켰다고.


도망이 쉽지 않은 이유는, 그것들이 밀어닥칠 때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음이다. 심장 박동이 올라가고, 신체 곳곳이 콕콕 쑤시며, 어딘지 모르는 가장자리부터 어두운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면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해 허둥댄다.



받아들임.

완벽한 도망은 불가능하다 생각한다. 그건 이미 나니까. 감정이 존재를 설명하는 수단일지 모르니까. 눌러 담은 지식과 경험으로는 주체성이 형성되지는 않는다. 그것들이 삭혀 분출되는 가스로부터 풍기는 향기가 '나'다. 뿜어내는 감정이 '나'의 고유한 향기를 만든다. 대사 기관을 운영하는 뇌의 부분들은 내가 사람으로서 형상만 유지하게 끔 한다. 동물적 분류의 인간이지 그것이 '나'는 아니다. 고유한 '나'는 생각을 관장하는 뇌의 부분들로서 발휘될 것이다.


대략 천억 개의 뉴런이 병렬 처리되어 발현되는 인간의 감정이 동일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런 이유로 뉴런 패턴이 바로 '나'의 고유성일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뉴런 패턴은 내가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 발동되어 판단을 끌어내기도 한다. 무의식적으로 풍기는 '나'의 냄새는 그리 피어 올라 '나'라는 존재를 만든다.


이런 내 모습으로부터 도망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라 생각한다. 아니라 부정해도 결국 나니까.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모습 조차 나라고, 이것이 안정을 찾을 수 있던 계기다. 거부하고 밀쳐내도 다스릴 수 없던 마음인데, 인정하자 되려 편해졌다. 자신이 내는 향기를 거부하고 탈취하며 속여보려 해도, 되려 탈취제와 뒤섞여 악취가 되고 만다. 자신의 향을 바꾸려면 자신의 원래 향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공허함 조차 받아들였다. 가끔은 완전히 뒤집어쓴 채 느껴보기도 한다.



의외의 성과.

공허함이 무엇인지 깔끔하게 설명할 순 없지만, 외로움, 황량함, 고독함, 쓸쓸함... 그 감정들이 다양히 엮인 어디쯤이라 생각한다. 공허함이 닥쳤을 땐 심장 표피가 까끌해져 예민하다. 오돌토돌 솟아난 돌기들이 센서 역할을 하는 마냥 미세한 감정까지 읽어버린다. 내가 느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감정을 아주 면밀히 느껴 볼 수 있는 것이다.


감정은 그저 감정을 느끼는 것으로 끝날 것 같지만. 모든 일에 영향을 준다. 흔히 일에 감정을 이입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감정이 이입되지 않은 일이 높은 성과를 낼 리 없다. 아주 간단한 전기 배선 조차도 다양한 신체 기관을 사용하고, 심미적 아름다움을 요구하기도 하니 말이다. 즉, 감정이입 없이 좋은 퀄리티를 낼 수 없다는 뜻이다.


하드 워커가 되라는 말은 아니다. 요즘 유행하는 문화처럼 일과 개인 생활에 소비되는 감정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나는 공허함이란 감정을 내 기반이 되는 감정으로 받아들이며 마음을 조절하는 능력을 쌓아가고 있다. 일이든, 놀이든, 무엇이든 공허한 감정에 얹여 놓으면 그 일이 진행되는 기세를 느낄 수 있다. 마음에 돋아난 돌기들은 너무 가볍거나 반대로 너무 무거운 위치가 어디인지 읽어내고, 즉각 위치 정보를 전달한다. 일 뿐 아니라 일상에 까지 확장되어 삶의 균형을 유지시키기도 한다.



감성? 감정적인 나.

"많이 경험해라"라는 말. 의도는 알겠으나 심히 폭력적인 말이다. "다양한 감정을 느껴라"라고 바꿔 쓰고 싶다. 다양한 감정은 꼭 경험으로만 만들어지지 않으니까. 매체를 통해서, 책을 통해서, 이야기를 통해서 간접 체험해 볼 수 있다. 그러니 누군가의 말처럼 '고생을 덜 해봐서 그래' 따위는 필요 없다.


나는 지극히 감정적이다. 마음이 가지 않는 곳은 발끝 방향조차 두지 않는다. 그게 내 삶의 원동력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모든 감정을 느껴 볼 수 있는 곳으로 걸음을 내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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