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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기 Sep 17. 2021

멜론 과즙에 그릇이 깨졌다.

끈적한 상념들

코렐이라 함은 안 깨지기로 유명한 식기의 대명사다. 90년대를 살아온 내게는 말이다. 그런 코렐 그릇이 과일 잔여물에 맥없이 나가떨어지다니.


8월에 선물로 받은 멜론이 상온에서 이주 정도 지나니, 일부는 상했지만 도려 낸 나머지 부분은 꿀을 발라 먹는 만큼이나 달았다. 그날도 식사 후 냉장고에 보관해 둔 멜론 몇 조각을 담아 먹고 난 뒤, 그릇은 책상 끝에 두었다. 1시간 정도 작업하고 있었을까. 느닷없이 쫙하는 소리와 함께 그릇이 세등분으로 나눠졌다. 볼 형태로 생긴 국그릇이었는데, 처음에는 도대체 뭔가 싶었다. 결론은 멜론 과즙이 마르면서 그릇을 깬 건데, 당시 습하기도 했고 부엌과 방의 온도 차이도 컸기에 그런 일이 일어났으리라 생각한다.


올해 들어 자꾸 오랜 것들을 버리는 버릇이 들었다. 오늘도 역시 구석구석 뒤져 버릴 걸 찾던 중, 무얼 버릴세라면 떠오르는 말들이 한꺼번에 뇌리에 쏟아졌다. "언젠간 쓰겠지", "이땐 이런 일이 있었지", "아까운데", "아 이건 쓰진 않지만 버릴 수가 없네"와 같은 말들 말이다. 한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생각이 생각을 불러, 과거의 미련까지 끄집어냈다. "그때 그랬더라면", "왜 그랬을까", "돌아갈 수 있을까", "다시 가도 버틸 수 있을까". 마치 당도 높은 과즙 찌꺼기가 심장에 말라 붙은 것처럼 몸을 쥐어짰다.


나는 무엇보다 미련을 버리고 싶었나 보다. 장롱 속 오랜 먼지 간직한 옷들을 모두 끄집어냈고. 신발장에 안 신는 신발들을 내동댕이 쳤다. 10년이나 관계를 맺던 사람들도 옳지 못한 모습에 잘라냈고. 본래 내 모습이 아니던 착한 허물도 벗겨냈다. 단순히 관계 정리, 대청소 정도로는 표현이 안되고, 심장 표면에 들러붙은 당도 높은 과즙을 닦아냈다고 하면 괜찮을까. 옭아매고, 쥐어짜던 끈적한 상념들을 띄어냈다. 


건강상 문제가 있던 지난날, 분명 내 정신 상태엔 당도 높은 과즙이 덕지덕지 말라붙어 있었을 거다. 온몸 진료받아도 아무 문제없다고 하니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그 시기로부터는 꽤나 지났지만, 조금이라도 남아있을지 모르는 찌꺼기를 닦아내려, 쓸데없이 보관된 오랜 것들을 버리는 것 같다. 찌꺼기들이 나를 망가뜨리지 못하게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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