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시콜콜 Nov 08. 2022

함부로 칭찬하지 않는다

마흔 즈음에

칭찬은 나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는 일이다.


읽은 것인지,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글감 메모에 한 줄 남아있다. 내가 만든 문장은 아니라는 말이다. 한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우리 사회 칭찬에 박했다. 나 역시 그랬고. 그런 말이 유행한 덕에 어떻게든 해보려고 노력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생긴 대로 산.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언어적인 칭찬이나 위로가 어색하다. 상대방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 캐치해서 맞춰주긴  하지만, 눈치가 없는 상대라면  행동은 자기만족일  상대방에겐  도움이 되지 않는. 사회적 관계가 원만해진 지금 돌이켜 보면, 그런 행동들도 인간관계에  역할   지만, 그냥 말도  잘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넌 너무 감정적이야'라는 표현은 2000년 초부터 많이 사용했던 것 같다. 뇌과학이 발달하기도 훨씬 전이고, 철학은 돈이 안된다던 시절이기도 했는데, 그러니 이성과 감성의 분리가 정말로 가능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고, 상황에 따라 감성을 배제할 수 있으리라 믿었을 거다. 이성은 체계, 논리, 과학의 느낌이 강하고, 감성은 감정 단어들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이성과 감성을 완전히 분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지금에야 이성과 감성의 구분이 사람의 경향이라고 할 수 있겠고, 우리는 적당히 구분할 수 있는 눈대중도 가지고 있다. 지금 시대에 목표를 향하거나 결과를 내야 하는 일에 있어 이성적인 판단이라 함은 대게 자본주의 관점일 것이다. 그러니 자본주의 시대에 확실하게 절여지기 시작할 무렵 칭찬은 감성을 자극하면서도 이성적 효율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된다. 그러니 더 벌고, 더 많이 모아야 했던 자본주의 초기 시절 칭찬은 누구에게나 좋은 것이다.


과하면 안 된다고 한다. 공중파에 유아 관련 방송이 많이 나오던 시기 어린아이들에게 무조건 적인 칭찬은 독이 된다는 전문가 의견이 많았고, 어린아이 대상의 다큐 방송에서도 자주 언급됐다. 차이는 있다. 어린아이 대상으로는 무차별적인 칭찬이 낳는 잘못된 결과가 문제 되는 경우다. 어른을 대상으로 하자면 '칭찬은 나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는 일이다.'라는 딱 한 문장으로 이해되리라 생각한다. 그것이 잣대라는 걸. 기준, 판단이라는 두 단어로 칭찬이 왜 잣대가 되는 건지 눈치챘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니 '칭찬은 나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는 일이다.' 직장인, 학생 그리고 가정의 자녀들에게도. 암묵적인 사회 기준이 어느 정도는 있지만 어쨌건 발화 대상이 선택한 기준선을 따른다.


꽤나 다양한 사람을 거치면서, 그릇된 칭찬이 많다는 걸 알고 있다. 간혹 칭찬이 불쾌하기도 했다. 그래도 당시엔 불쾌함을 가지는 것에 그쳤지 기준이나 판단이라는 거창한 단어로 고민해 보지는 않았다.


정리를 하자면, 감정과잉 시대 칭찬은 어쩌면 불쾌함을 낳을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모호한 경계에 있는 행동에 사탕발림 같은 칭찬은 상대를 불쾌하게 할 수도 있음이다. 칭찬이란 것이 감성을 자극해 이성적 효율성을 마냥 드높이던 역할을 하기도 하겠지만, 요즘은 상대의 순수한 호의마저 있는 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대다. 나부터 그렇다. 누가 괜한 칭찬을 하면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론 '뭘 안다고 칭찬이야'라는 식이다. 격하게 표현하자면 말이다. 그러니 나는 상대의 결과가 좋더라도 모르겠으면 그냥 모르겠는 얼굴로 상대한다. 정말 칭찬해야 할 일이라면 내 기준과 잘한 포인트를 정확히 전달하려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성과 감성을 완전히 구분할 순 없지만 우리는 눈대중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그 정도 분간이 가능하게는 상대에게 말할 수 있을 거다.


과거에 칭찬하려 노력했던 것과 지금의 칭찬은 많이 다르다고 말하고 싶다. 예전엔 뭘 칭찬해야 할지 모르면서 무차별 적으로 칭찬하려 했었기에 못했던 건데, 지금은 칭찬할 부분을 정확히 가려내는 것이니까. 그러니 꼭 '잘했다'라는 표현을 하지 않더라도 상대에게 잘 된 부분에 대한 나름대로의 기준과 이유를 이야기한다. 물론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유창 언어로 전달하는 건 아직도 잘 못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의 기준과 포인트를 명확히 전달하는 것이 상대를 납득시키면서도 상대가 어떤 것에 기뻐해야 하고, 혹시 더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어떤 부분이 더 고민해야 할 부분인지 고찰할 수 있는 기회를 넘겨줄 수 있을 것이다. 칭찬이라는 것조차 나름대로의 기준 형성하게끔 하거나,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끔 말이다.

이전 13화 남 탓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