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즈음에
30대 중반을 거치며 나는 삶의 목표나 가치관에 아주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중 하나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이다. "남자는 길바닥의 거지와도 친해질 줄 알아야 한다."라는 아버지의 사상이 깊게 박혔던 지라, 나는 누구에게나 호인으로 보여야 한다는 관념이 있었다. 그래서 어디서나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 노력했고, 누구든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공감해보려는 행동이 그중에 하나인 줄 알았다. 한데, 친해질 줄 아는 것, 호인, 좋은 사람은 차이가 있다는 걸 거의 40에 다달해서야 깨달았다. 게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행동조차 착각한 부분이 많았다는 걸 알게됐고.
공감에 대해서는 최근에서야 더 많이 생각하게 됐는데, 타인의 감정은 말을 발화하는 사람에게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누군가에게 공감하겠다고 타인의 감정을 공감하려는 행동이 강압적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좋은 사람이기 위해 누구든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공감하려 했던 행동은 멍청한 일이었고, 다른 한편으론 강압적인 행동이 되기도 한 것이다. 강압적이라는 건, 상대는 상태가 나쁘지 않은데 괜한 공감이 상대를 더 나쁘게 몰고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오히려 상대가 기분 나빠하는 게 더 나을지 모른다. 본인의 마음을 스스로 더 잘 알고 있다는 표현일 수도 있으니까. 심리상담사는 상담자와 감정을 공유하면 안 된다고 들었다.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물론 상대를 분석하거나 판단하기 위해 그런 건 아니겠지만, 어설프게 공감한답시고 상대를 더 나쁜 상태로 몰고갈 수 있다. 상대는 전혀 나쁜 상태가 아닌데, 나쁜 상태여야 하는 건가라는 착각을 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괜한 공감은 쓸데없는 말을 낳기도 하고, 위로를 받아야 하는 상대를 되려 미안하게 하기도 한다. 그냥 공감해도 되는 상황, 그렇지 않은 상황을 구분하는 건 센스에 맡겨야 하는 일이겠지만 대개의 경우 질문이 나을 수 있다. 세심한 질문이 오히려 상대를 배려하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힘들어하는 친구가 있을때 그저 옆에 있어주기만 했던 적도 있다. 그게 위로보단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지금은 위로도 그저 있어주는 것도 아닌 질문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