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일기 21주 차
<깨어진 컵>
컵은 누군가의 실수로 깨어졌을 수도 있고,
누군가 의도적으로 던졌을 수 있다.
남이 혹은 내가
어떤 이유건
이미 컵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바닥은 깨어진 유리 파편들과
쏟아진 와인으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나는 화가 나는가? 왜 화가 나는가?
나는 사건을 일으킨 사람을 탓할 것인가?
나는 사건을 일으킨 나를 탓할 것인가?
아름다운 컵은 왜 깨어졌는가?
컵은 왜 깨어졌을까? 내가 놓쳐서? 웨이터가 와인을 따르다가? 다른 손님이 지나가다 건드려서? 내가 던져서? 하지만 이미 깨어진 컵을 왜 그것이 깨어졌는가 고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벌써 벌어진 일이니.
사람 사는데 문제는 언제, 어디서나 인지하지 못할 때 다가온다. 인지하고 있다면 사고가 아니니까. 이렇게 인지 못하는 사이 발생한 사건을 두고 탓하는 사람들이 있다. 면박을 주거나 인신공격을 하는 등 말이다. 그런데 그 사건이라는 것은 일부러 저지른 경우보다 대게는 의도치 않게 발생된다. 그런데 사건을 탓할 수 있는 걸까? 그 사건을 저지른 사람도 참으로 당황스러울 텐데 말이다.
컵이 깨어진 컵을 탓하지 말라,
그것을 탓하는 동안
의미 없는 시간만 흘러갈 뿐이니
우리는 대게 사건을 발생자 또는 제공자의 잘못으로 이끌어가려는 습성이 있다. 그래야 자신에게 안도감을 주니 말이다. 그리곤 그것을 화젯거리로 만들어 사람들 사이에서 사건을 퍼뜨리는데,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투자해 잘못을 따지기 위한 논리까지 세우기 이른다.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지나간 것을 고민하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그것이 역사적 사건을 분석하는 일도 아닐 텐데, 그러니 깨어진 컵을 생각하는 고민이 뉴튼과 같이 발전적인 수준이 아니라면 당장 고민을 그만두는 것이 좋을 테다. 고민은 결국 스스로를 궁지로 몰고가 더욱 어둠 속으로 빠지게 만드는 일일 뿐이니 말이다.
바람의 검심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보면 이야기 초반에는 주인공이 과거에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죄책감으로 자신 주변의 인물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다 이야기가 많이 흐른 뒤 보스급의 캐릭터와 싸우기 위해 그와 대적할 수 있는 필살기술을 배우려고 예전 자신을 가르친 사부를 찾아가는데, 보스는 기술의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태도를 지적한다. 그 이후 주인공은 며칠의 고민 끝에 결국 경지에 도달하는데, 요지는 이렇다. 주변 사람들의 목숨이 소중하고 그들를 지키고 싶다면 결국 중요한 건 주인공 스스로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본인이 살아있지 못하고선 모든 것이 의미가 없으니 다른 사람을 살리기 이전에 자기 자신부터 아껴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이다.
누군가를 생각하기 전에 자기 자신부터 아낀다는 건 유교적 문화에선 다소 이질감이 있을 수 있고, 이기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내가 죽어서는 내가 없어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데, 그러니까 핑계라도 대 보자 "내 코가 석자라서요"라며.
글에서 '탓'이라는 것과 '과거의 죄책감'이라는 것으로 깨어진 컵을 바라보는 시선을 생각해 봤다. 결국 깨어진 컵이란 이런 것이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밑거름으로 생각한다면 좋은 영양분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괜한 시간을 낭비하지는 말자고.
깨어진 컵을 생각하며 남을 탓하거나 죄책감으로 스스로를 질책하는 삶을 살지 말자고 하고 나니, 내 안의 짜증과 화가 한 순간 덜어진 느낌이다. 내가 그럴 필요가 없었지, 내가 나를 소중하게 여기기도 아까운데 라며. 그리고 이젠 어둠이 있던 공간에 아름다움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