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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조 Jan 03. 2019

[영화 에세이]#9.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2)

우리가 껴안아야 할 사람들

#2부: 거위를 노래하다     


 2부의 공간은 서울이다. 군산과 서울은 대칭을 이루고 있다. 1부에서 송현은 민박집주인에게 본 적이 있지않냐고 묻는 반면, 2부에서는 윤영이 약사와 치과의사에게 똑같이 묻는다. 1부의 민박집과 2부의 치통을 해결하는 공간들은 데칼코마니를 이룬다. 따라서 1부에서 민박집에 머물며 해소하려 했던 것은 2부에서는 치통으로 드러난다. 2부는 치통 때문에 진통제를 받아 든 윤영이 조선족 집회를 참여하는 송현을 조우하는 것으로 막을 연다.     

 

 1부에서 송현은 자신을 순이라 의심하는 이에게 화를 내지만 2부에서는 조선족 집회에 참여하며 술에 취해 조선족 흉내를 낸다. 그녀는 자기가 한국인이고 큰할아버지가 조선족인 것은 우연의 산물이라 한다. 2부 송현은 1부에 비해 조금 더 조선족에 가깝게 놓여있다. 두 송현은 단지 제목 앞에 놓여 있느냐, 뒤에 놓여있느냐의 차이로 다른 행태를 보이게 되는 것. 말미에 송현이 오해받은 순이라는 인물이 윤동주의 후손이라는 점이 드러나면서 이 주제는 더욱 심화된다.     


 반면 1부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영아’는 2부에 몰아서 등장한다. 윤영을 부르는 이름도 ‘영아’이고 거위도 ‘영아’라고 불린다. 허나 두 ‘영아’는 아무런 관계성도 가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술에 취해 거위를 흉내 내며 춤을 추는 윤영을 보고 사람들은 비웃기 마련이고, 이때 찾아온 형님은 뭐 하는 거냐고 호통을 친다. 두 영아는 우연히도 같은 곳에 놓였지만 서로 합치될 수 없다.      

영화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영화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2부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치통의 정체는 드러난다. 감옥처럼 창살 쳐진 방 안에서 윤영은 치통으로 잠에서 깨 진통제를 먹는다. 이때 마주한 것은 조선족 가정부를 겁탈하려는 아버지. 영화는 민족의 분열과 폭력을 이렇게 고발한다.      


 진통제를 먹어도 치통이 해결되지 않자 윤영은 치과를 찾는다. 치과에서 윤영이 바라보는 곳은 윤동주 문학관이다. 치통의 원인은 그 어딘가 즈음 있지 싶은데. 앞서 말했듯 윤동주는 대한민국의 근간이자 민족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윤영은 묻는다. '윤동주도 치통이 있었을까?' 윤영은 윤동주를 쫓는 것으로 민족 간 행해지는 폭력과 우리 민족의 외연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를 고찰한다.     


 결국 그 답의 힌트는 군산도, 어느 치과도 아닌 그의 집안에 있다. 윤영은 가정부 순이에게 온 편지를 보고 그가 윤동주의 후손임을 알게 된다. 민족의 경계를 정의하며 민족적 정체성을 찾는 것은 어디 먼 도시로 가는 것도, 배를 타고 섬을 향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마주 보아야 할 이들은 지금 옆에서 살을 부대끼고 살고 있는 인물들이다.      


 그럼에도 2부는 온전히 완결을 맺지 못한다. 시간상으로 2부는 1부로 이어지기 때. 결국 인물들은 답을 찾기 위해 다시 군산으로 흘러들어 가는 것이다. 한편 2부 중간쯤 송현은 윤영에게 혼자 먼저 내뺐다고 질책한다. 이 대사는 어제의 술자리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군산에서 송현을 놓고 먼저 올라와버린 사건에 대한 언급도 있다. 시간상으로는 2부가 1부에 선행하지만 2부에서 1부의 사건에 대해 질책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1부와 2부는 서로 순환하는 구조를 지닌다.      


 결국 반복되는 질문 아래, 답이 놓여있는 곳은 명확하지 않다. 다만 감독은 가능성 있는 공간의 하나로 서울을 제시하고 있다. 윤영이 시를 쓰지 않은 것은 10년, 윤영의 어머니가 죽은 지도 10년. 윤영은 어머니를 읽고 시를 쓰지 못하였다. 그가 다시 시를 쓸 수 있는 곳은 어디일지. 역사에 치인 우리 민족이 서로를 껴안을 곳은 도대체.      

영화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좌측 상단부터 ㄹ자로 (1),(2),(3)
 하지만 단순히 굴레 속에서 찾지 못할 답만 찾으며 갇혀있는 것은 아니다. 엔딩 근처에서 송현은 모텔로 향하던 윤영을 질책하고 다른 곳으로 이끈다.(1) 이어진 씬은 집으로 돌아가 순이의 계보를 확인하는 씬.(2) 그다음 씬은 노래방에서 군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3) 맥락상 (1)과 (3)은 연속된 장면인 것 같은데 송현의 옷차림은 달라져있다.

 난데없이 (2)가 인설트 되어있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 일까. 이는 앞서 언급한 순환구조와 연관이 있다. 윤영과 송현은 군산과 서울만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이 장면(1)은 송현이 윤영을 두 가지 선택지로 이끄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2): 집으로 돌아가거나, (3): 군산으로 가거나.

 영화는 민족을 바라보기 위해 주위를 바라볼 것이냐, 과거를 바라볼 것이냐 하는 선택지를 윤영, 윤영을 너머 우리에게 건넨다.              

 우리는 시대가 갈라놓은 땅 위에 산다. 그리고 우리는 폭력을 겪는다. 허나 그 폭력은 그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 없는 우리 민족끼리의 상잔이다. 영화가 그러했듯, 나도, 감독도, 그 누구도 우리 민족의 아픔이 치유받을 곳을 쉬이 말할 순 없다. 다만 어디든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을 꼭 껴안을 수 있기를. 그렇게 하는 것에 희망이 있기를. 다시는 같은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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