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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그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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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종 Feb 23. 2019

#59 사람과 사람 사이 III

영화 <완벽한 타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가까운 사람에게서 생각지도 못했던 무엇인가를 발견하고는 말한다. 


"니가 그런 사람인줄 몰랐어. 우리 관계는 잘못된 것 같아" 


우리 관계가 잘못된 걸까?  상대방이 문제인 걸까? 아니면 내가 애초부터 그 사람이 그랬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 더 문제일까? 모르는게 약이라고들 한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어느 정도의 선까지 모르는 것이 약일까?


극단적인 예를 한번 들어보자. 천사같은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과거는 연쇄살인마다. 하지만 과거를 뼈저리게 뉘우치고 속죄하며 개과천선하여 살아가고 있다고 치자. 그 사람이 당신의 배우자다. 여기 다른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아무런 과거 범죄 전력이 없다. 하지만 너무나 다혈질이라서 언젠가 사고 한번 칠 것 같다. 이 사람 역시 당신의 배우자다. 같이 사는 것이 불안불안하지만 근근히 부대끼며 살아가는 중이다.


당신이 어느 쪽의 배우자이건 어느날 갑자기 당신은 마치 하느님처럼 모든 과거와 현재의 진실을 알게 된다. 당신은 어떤 선택과 어떤 행동을 하겠는가? 제시한 단순한 상황만으로 무엇인가 결정하기는 쉽지 않을수 있겠지만 첫번째 경우가 두번째 경우보다 많은 고민을 불러 일으킬 것은 자명한 일이다. 비록 그것이 미래도 현재도 아닌 지나간 과거의 일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배우자나 절친한 친구의 과거나 본모습을 알게 되어서 한시라도 빨리 헤어지는 것이 나은 일일까, 아니면 평생 모른채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더 좋을 일일까?



영화 <완벽한 타인>은 친밀한 인간관계 속에서 낯섬과 배신감을 발견하는 영화다. 그 매개체는 휴대폰이다. 지금 우리는 상대방이 나에 대해 아는 것보다 자신의 휴대폰이 나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본의 아니게 휴대폰 때문에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다. 친구에게 보내려던 회사 부장님 욕을 부장님과의 채팅창에 전송한 후 죽고 싶은 심정이 되기도 한다. 휴대폰은 문명의 이기지만, 인간 관계에서는 시한폭탄이 될 수 있음을 영화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화에는 네명의 남자와 세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40년지기 남자 절친들의 부부동반 집들이 모임이 유일한 영화의 무대다. 저녁식사를 하는 도중, 한 명이 게임을 제안한다. 게임의 룰은 저녁시간동안 자신의 휴대폰으로 오는 모든 것들을 서로에게 공유하는 것이다. 모두 공감할 수 있듯이, 영화는 막장으로 흐른다. 그들의 관계에서 일어날수 있는 사소한 비밀들부터 다소 충격적인 진실들까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것들중의 일부는 우리가 터부(Taboo)라고 부르는 것들이고, 어느 일부는 기만과 거짓이라고 부를수 있는 것들이다. 그들은 타의적으로 모두 솔직해지지만 모두가 크고 작은 상처를 입는다. 


우리는 자신의 치부를 숨김으로써 알고 있었던지 모르고 있었던지 간에 타인의 치부 역시 애써 숨겨주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보호다. 이 경계와 은밀한 맹약이 깨지는 순간 우리는 가까운 사람에서 완벽한 타인이 된다. 아주 가끔은 그 경계를 열어놓는 것이 해방과 치유를 향한 한걸음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위험부담이 큰 무모한 도전일수도 있다.



오래전 근교의 펜션에 지인들과 놀러간 적이 있었다. 간밤에 비가 오고 난후, 맑개 개인 이튿날 아침 일찍 발코니에서 바라본 호수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호수근처로 산책을 나갔다. 그 곳은 사실 호수라기보다는 저수지에 가까운 곳으로 군데군데 낚시터가 있었다. 가까이 가서 바라본 호수의 모습은 호젓한 펜션의 발코니에서 바라본 아름다웠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간밤에 낚시꾼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와 오물로 호수는 지저분했고 악취까지 났다. 실망을 안고 펜션으로 돌아가며 생각했다. 차라리 그냥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 걸 그랬다고 말이다.


어느 나이 지긋한 지인은 사람들을 깊이 알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적당한 선에서 관계를 유지해야지 너무 가까워지면 결국 멀어진다는 것이 지인의 지론이었다. 그는 이렇게 얘기했다. 


"오래전에 몽골에 여행을 간적이 있어요. 광활한 초원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기분이 어찌나 좋았는지 몰라요. 저 멀리서 아주 멋진 큰 나무 한 그루가 보였어요. 그 경치가 너무 완벽했어요. 말을 타고 그 곳으로 내달렸죠. 하지만 도착한 그곳은 실망 그 자체였어요. 멀리서 보았던 것처럼 아름답지도 않았고, 온갖 동물의 똥과 쓰레기가 나뒹굴고 있었죠.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가까이 다가가서 상처 입었던 게 몇번인지 몰라요"


물론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 호수의 쓰레기, 몽골 초원의 오물과 같은 것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요즘과 같은 시대에는 더욱 그럴 확률이 높아진 것은 아닐까? 자신의 좋은 것들, 잘 난 것들만을 내보이고 싶어하는 세상이다. SNS로 자기 속내를 드러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모두가 포장된 세상 속에 적당히 감추며 살아가고 있다. 더욱 가까워진 듯 보이지만, 우리는 사실 더 멀어지고 있다.



막장 결말이 나온 이후, 영화는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전 또다른 결말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들이 게임을 하지 않았을 경우의 영화의 결말이었다. 얼핏 그것은 해피엔딩처럼 보이기도 했다. 건드리지 않았더라면 터지지 않았을, 그래서 모두가 행복했었을 그 결말을 과연 거짓위에 쌓여진 사상누각이라고 부를수 있을까.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정현종, <섬>


가고싶은 욕망은 이상일뿐, 사람들사이의 섬은 멀리서 바라볼 때 더욱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들이 바라볼 수 있는 경치의 정점(頂點)을 가지고 있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 역시 그 어떤 관조의 정점이 있는 셈이다. 극중 수현(염정아)는 자신에게 무관심한 남편 태수(유해진)로부터 블로그에 소설을 올리는 것에 대한 오해를 받고 절규한다.


"난 그 속에서 뜨거워. 사는 것처럼 사니깐!"


너무 들어가면 자칫 뜨거워서 데일수 있는 그 지점에 우리는 유무형의 잠금장치를 걸어놓고 있다. 그것은 남들에 대한 내부의 잠금장치라기보다는 어쩌면 우리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밖으로의 잠금장치인지도 모른다. 내가 열 수 없는 그것을 누군가 열어주길 바라는 그 무엇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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