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란 잠을 깨우고 바쁜 아침을 맞으며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고쳐 매는 일상은 행복이다. 자신을 긍정적인 인간으로 몰아가며 하루를 충실히 하고자 함은 이 시대 직장인의 자화상이다. 그러나 하루하루의 현실은 그 행복이 유지되도록 두지 않는다.
일상이 그렇듯 자신의 꿈과 이상을 반쯤은 접어두고 조직의 목표에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있어 우리는 하루를 열심히 살고 있다고 자부한다. 꿈, 희망, 행복이라는 단어가 친근하면서도 나와는 멀리 있는 듯하고, 바쁘고, 어렵고, 괴로운 결정이 나와 맞지 않는 옷을 걸친 듯 불편함에도 항상 적당히 거리를 두고 함께한다는 불편한 진실이 직장생활이다.
이러한 조직의 풍경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먼저 앞서가고 있는 상사도 같은 경험을 했기에 그저 받아들이며 본질적 갈등 사항은 같다고 스스로 우겨대기 때문이다. 하지만 먼저 함과 뒤에 온다는 시간의 차이는 표출되는 현상을 다르게 한다. 조직의 목표가 우선이라고 하는 상사와 개인적 삶이 우선이라는 부하가 대결하는 상황에서 어느 한쪽에 손을 들어 줄 수는 없다. 조직의 목표를 강요하는 상사에게 대들어 대꾸하고 명령을 거부하는 것을 가끔은 역린(逆鱗):용의 턱 밑에 거꾸로 난 비늘. 이 비늘을 잘 못 쓰다듬어 결의 방향을 역행하면 용은 그 누구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이라고 표현한다. 고집을 부리는 상사도 자신이 너무하다는 것을 알고, 부하의 삶을 존중한다. 그렇지만 이 순간은 내 말을 거부하지 말라는 모종의 압력 앞에 부하의 거부권 행사는 역린이 되고 만다.
조직에서 상사의 거꾸로 난 비늘은 도대체 몇 개인가? 하루에도 몇 번이고 대립할 수밖에 없는 역린이 있어 조직이 더 발전할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에 동의하고 싶지는 않다. 특히 이전의 성공 경험이 모두 맞을 것이라는 추론 앞에서 단호히 역린을 해보고 싶은 젊은 호기가 아직도 가슴 한편에 있음은 25년 직장생활이 아직도 약관(弱冠)이기 때문이다.
“내가 잘못된 것을 나도 안다. 그러나 그것만은 건들지 말아줘.”라는 상사의 호소에 어설픈 동조를 하려다가도 지금 나의 동조가 변화를 막는 보수적 전통이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아찔한 절벽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느낌이 든다. 그것은 나의 마지막 남은 조직에 대한 충정이다. 그러나 거꾸로 난 비늘이 하나가 아니다 보니 이 한 몸 불살라 지금 뛰어내릴 수도 없어 전전긍긍하는 과거의 나와 지금의 젊은 후배 직원들을 역린이 중첩될 때는 안타깝다.
현실은 그렇다. 언제나 선택과 결정의 순간에 위태롭게 자신을 내몬다. 그래서 힘들고, 어렵고, 괴로운 변화의 순간을 맞게 하는 것이다. 사람을 대함이 이러한데 보이지 않는 환경과 경영이라는 것 앞에선 역린의 대상인 자들은 어떠할까? 생각해본다. 지금 내가 갖는 물러서기 싫은 그들의 고집 앞에 나는 과연 당당히 맞설 수 있는가? 그리고 내가 간직한 젊은 호기가 내 뒤의 후배들에게 또 다른 역린이 되는 것은 아닌가? 반성하고 또 반성하며 절대로 보수적 경험주의를 강요하는 선배가 되지 않기로 다짐한다. 꼰대가 되는 시간을 늦출 수 있는 방법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