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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돌 Jul 17. 2023

【철 지난 워라밸】


     

  “워라밸이 뭐야! 난 그런 거 몰랐어.”


  OECD 국가 중 한국의 워라밸이 최하위권이란 보고가 있다. 한국인의 적정노동 시간을 보장하는 수준이 31개국 가운데 뒤에서 세 번째라는 아침 신문의 기사를 보면서 내게 워라밸은 어떤 의미였나 생각해본다.    

 

  스물 아홉에 그룹 홍보실에 입사하면서 시작된 하루 12시간 이상의 근무는 그냥 당연한 일이었다. 2005년 정도 전까지는 기사클리핑(아침에 주요기사를 스크랩해서 올리는 일)도 있었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 앞에 나가 저녁 가판 신문을 확인해 다음날 조간기사를 대응하기도 했다. 혹여 회사에 좋지 않은 기사가 가판에서 확인되면 그날은 방어홍보에 퇴근을 포기해야 하는 날이었다.


  홍보쟁이의 10년은 내 삶이 없었다고 보아도 그리 억지는 아니다. 가판기사를 보고 방어홍보를 하는 날 밤이면 담당기자를 만나고 편집국장의 재가를 얻어 기사를 수정하든가 기사를 내리든가 해야 성공한 방어홍보가 된다. 그러면 끝인가? 그렇지 않다. 새벽 3시 30분쯤 가가호호 배달될 조간신문을 윤전소에서 미리 보고 기사 수정을 확인하면 전날 가판 신문과 새날 조간신문을 들고 멋지게 해장국집으로 향해 소주 한 잔을 걸칠 수 있었다. 그리고 집으로 가든가 아니면 사우나에서 대강 쉬고 다시 회사로 출근한다. 그래서 나는 외박 아니면 새벽 퇴근이 잦았다. 1998년 결혼을 하고 아내와 신혼의 단꿈을 꿔야 할 때, 아내는 피로에 젖어 일어나지 못하는 나를 깨우며 외치듯 짜증내며 말했다.     


  “당신이 찌라시야. 왜 매일 조간신문에 껴서 들어오는 거야?”


  그나마 아내도 당시에는 모 중소기업 홍보실에서 근무해 매일 술에 쩔어 들어오는 나를 이해해 주기는 했지만 이혼 당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다 싶다. 워라밸은 그렇게 나와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오십 육세가 되어 회사를 퇴사하니 그동안 보상받지 못한 워라밸의 역전이 일어났다. 내 삶의 시간이 아주 여유롭다. 철 지난 버킷리스트를 보니 적어 놓기만 하고 못한 것이 너무 많다. 개중에는 이미 실행하기엔 너무 버거운 것도 보인다. TV에서는 코로나가 시들해지니 해외 여행프로그램이 대세다. 대리만족의 여행, 경험과 일상의 행복이 남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다. 때로는 문명의 혜택으로 VR(가상현실)이 대신하기도 한다. 나도 이제 저래야 하나? 나의 버킷리스트는 그래도 홍보실을 떠나 교육팀장으로 일하며 절반은 실현한 듯했지만 아직 생각도 못한 것이 있어 철지난 버킷리스트를 수정해본다.     


  글을 쓰고 있는 것도, 매주 한 권의 책을 보겠다는 다짐도, 영어회화 다시 해볼까? 하는 마음도 아주 뜨겁지는 않다. 그저 이제는 미래보다 현재가 중요하다는 마음으로 하루에 충실하다. 오늘은 글을 썼으니 내일은 운동해야지 그리고 다음 날은 친구 만나 술도 한 잔해야지 하는 1일 1과제를 실행하기로 한다. 하루 하나씩 충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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