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의 [거대한 100년, 김수영] ⑨ 하이데거 <‘시간’에 민감했던 시인, 현실과 역사 앞에 물러섬 없었다>에서 임동확 교수는 김수영이 하이데거적인 시간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적절하게 설명한다.
“하이데거의 용어인 ‘현존재’를 대신하여 그를 ‘시중인’(時中人/市中人/詩中人)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시간’의 의미에 대한 지대한 관심 속에서 자신의 삶과 시의 존재 의의를 묻고자 했다.”
임동확 교수는 김수영이 하이데거를 수용하는데 그치지 않고 극복했다고도 설명한다. 김수영은 “그저 인류의 신념과 이상을 관조하는 데 그친 하이데거”와 달리,“현대사회가 제출하는 역사적 과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열의와 더불어 전위적이고 현대적인 시인이 추구하는 언어적 순수성에 사회적이고 인간적인 윤리”를 포함시킴으로써 하이데거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수영이 초기에는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다가 이후에 이를 극복했다고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김수영은 「모리배」(1958)와 「미인」(1967)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하이데거의 초월성과 사회적 현실성 사이에서 줄곧 긴장과 균형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리배」에서 시적 화자는 “언어는 나의 가슴에 있다”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나는 모리배(謀利輩)들한테서 / 언어의 단련을 받는다”라고 하면서, 그들이 자신의 팔”, “밥”, “욕심”을 지배한다고 덧붙인다.
여기서 '가슴'은 초월적인 정신을 상징하는 반면에 ‘팔’, ‘밥’, ‘욕심’은 현실적인 생활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은 시인으로서 초월적인 언어와 정신을 추구하지만,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는 모리배들이 지배하는 현실적인 생활세계 속에서 언어의 단련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가 “그래서 나는 우둔(愚鈍)한 그들을 사랑한다”라고 고백하는 것도 모리배들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생활세계를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충실하겠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물론 그가 현실적인 생활만을 추구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모리배를 사랑하면서도 언어를 ‘존재의 집’으로 간주하는 “하이데거”를 읽는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생활과 언어”가 밀접해졌다고 말하는 것도 현실적인 생활과 초월적인 정신을 모두 추구하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모리배들의 현실적인 생활과 하이데거의 초월적인 언어를 모두 사랑하면서, 그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추구하겠다는 말이다.
마지막 연에서 그는 “언어가 원래 유치한 것”이라고 규정한다. 초월적인 시의 언어도 원래는 유치한 현실 생활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자신도 유치한 현실 생활에 충실하기 위해 모리배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거듭 밝힌다.
심지어 그는 속물적인 모리배를 자신의 “화신(化身)”이라고까지 긍정하면서, 현실적인 생활에 충실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다. 이제는 모리배의 현실적 생활과 하이데거의 초월적 정신 사이에서 긴장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한편, 「미인」에서 시적 화자는 미인(美人)이 "자기 얼굴"을 싫어할 것이라고 하면서, 이것이 미인이 될 수 있는 조건이라고 말한다.
그는 당시의 산문 「미인」에서 자본주의의 사회에서는 “돈이 없이는 자유가 없고, 자유가 없이는 움직일 수가 없으니, 현대 미학의 조건인 동적(動的) 미를 갖추려면 미인은 반드시 돈을 가져야 한다”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돈 있는 미인”을 미인으로 생각하려면 있는 사람의 처지에 공감할 수 있을 만한 돈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현대시를 쓰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라는 “속세의 철학”을 제시한다.
이로 보아 미인이 자기 얼굴을 싫어할 것이라는 말은 돈 없이는 자유도 없는 자본주의 시대에 ‘미인=미학’은 현실적으로 돈이 있어야 하지만, 속물적인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이에 대한 혐오의 태도를 함께 지녀야 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어서 그는 미인과 앉은 방에서 방문이나 창문을 따놓는 것이 “담배 연기”만을 내보내려는 것이 아닐 것이라며 암시적으로 시를 마무리한다.
그는 산문「반시론」에서 “창문-담배·연기-바람”을 연결하면서,그가 방문이나 창문을 따놓은 다른 이유가“그녀의 천사 같은 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릴케의 「오르페우스에 바치는 송가」에서 “신(神)의 안을 불고 가는 입김”이나, 하이데거의 「릴케론」속에 인용된 헤르더의 글에 있는 “신적인 입김”처럼 초월적인 “바람”과 연결시킨다.
이것은 그가 지금 속물적인 미인과 마주 앉아 있지만, 릴케의 초월적인 정신을 상징하는 천사, 신적인 바람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놓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현실적인 미인을 긍정하더라도 속물적인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초월적인 천사도 함께 추구하겠다는 말이다.
그는 자신이 제시하는 미인이 “천한 미인”이 아니고, 평소의 율법을 깨뜨린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오르페우스에 바치는 송가」에 나오는 “노래는 욕망이 아니라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 그것은 급기야는 손에 넣을 수 있는 사물에 대한 애걸(哀乞)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노래는 존재다.”라는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이것도 자신이 현실적인 미인과 초월적인 천사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추구하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긴장은 그가 요즘의 강적인 하이데거의 「릴케론」에서 “빠져 나갈 구멍”을 찾고 있다고 하면서, “뚫고 나가고 난 뒤보다는 뚫고 나가기 전이 더 아슬아슬하고 재미있다.”라고 말하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이것은 하이데거와 릴케의 초월성을 부정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현실성과 초월성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긴장을 추구하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릴케가 “내려오면서 만난 릴케가 아니라 세익스피어의 부근을 향해 더듬어 올라가는 릴케다. 그러니까 상당히 반어적인 릴케가 된 셈이다.”라고 하면서, 이 시 전체가 ‘반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도 자신이 제시하는 미인은 릴케의 천사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천사의 반어로서 긴장 관계에 있는 미인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가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그녀를 만나게 되면 “때늦은 릴케식의 운산만이라도 홀가분하게 졸업해야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하이데거와 릴케의 부정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 산문의 마지막에 “릴케와 브레히트의 싸움”으로 제시되는 것처럼 그는 현실적인 미인과 하이데거와 릴케의 초월적인 천사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수영이 하이데거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김수영이 하이데거와 갈라지는 핵심적인 지점은 영혼을 가진 인간으로서 초월적인 정신을 지향하면서도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생활인이 되어야 한다는 양면성을 인정한 것이다.
초월적인 인간을 자처하는 독재자가 열등한 생활인들 위에서 군림하는 반민주적이고 반자유주의적인 독일 나치즘의 사상적 기반으로 악용되었던 하이데거 철학의 위험성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힘도 김수영의 다원주의적 균형 감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하이데거를 전적으로 긍정하면서 모리배들을 부정하거나, 하이데거를 전적으로 부정하면서 모리배들처럼 현실적 생활만을 추구했던 것이 아니다.
김수영은 초월적 정신과 현실적 생활을 모두 긍정하면서 양극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추구했던 다원주의적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