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의 [거대한 100년 김수영] ⑧ 기계 <헬리콥터·금성라디오…그는 본질을 꿰뚫는 관찰자였다>에서 오영진 교수는 한국문학사에서 김수영 문학의 특이한 점이 “일상의 사물이나 기계, 나아가 전쟁 무기 등을 시적 소재로 끌어들이는 과감성”이라고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의 시에서 화자가 “사물에 대해 말하는 존재가 아니라 관찰하는 존재”가 된다는 설명도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오영진 교수의 말대로 김수영이 다양한 기계를 시적 소재로 삼았던 주된 이유가 단순히 기계를 관찰하고 이로부터 “자기 자신을 단련하는 수련법”을 배우려고 했던 것인지는 의문이다.
그의 시에서 기계는 서양의 과학문명을 상징하는 소재로서 문명과 정신, 문명과 전통의 긴장과 균형을 사유하는 핵심적인 대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헬리콥터」(1955)에서 그는 “우매한 나라의 어린 시인들”이 “헬리콥터”를 보면서 “어두운 대지”를 차고 이륙하는 것이 힘이 들지 않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젊은 시인들이 헬리콥터가 가볍게 이륙하는 것을 보면서, 인간이 대지로 상징되는 현실 생활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는 뜻으로 보인다.
시인으로서 초월적인 예술에 전념하려면 먹고살 수 있는 돈이 있어야 하는데, 과학문명이 발달해서 인류의 생활이 전반적으로 향상되면 이것이 그리 힘든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는 “설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헬리콥터가 “풍선”보다도 가볍게 상승하는 것을 보면서 놀랄 수 있지만 또한 놀라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이유로 그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자기의 말”을 잊고 “남의 말”을 해 왔으며, 그것도 간신히 더듬는 목소리로밖에는 못해 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현실 생활 속에서 먹고살기 위해 자기의 말을 잊고 남의 말을 하는 설움을 당해 온 사람들은 자신이 갇혀 있는 생활을 헬리콥터가 가볍게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지만, 과학문명이 발달하면 생활난으로 인한 설움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그리 놀랄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설움이 설움을 먹었던 시절”, 즉 현실 생활 속에서 먹고살기 위해 설움을 감내했던 시절보다도 더 “젊은 것”이 헬리콥터로 상징되는 과학문명의 영원한 생리라고도 말한다.
이것은 과학문명이 현실적인 생활난으로부터 자유롭게 비상할 수 있도록 해 주므로 영원히 새롭고 젊은 것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그는 과학문명이 현실적인 생활난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과학문명을 전적으로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헬리콥터가 “1950년 7월”, 즉 한국전쟁 이후에 파괴적인 전쟁무기로 우리나라에 나타났다는 문제도 함께 지적한다.
“린드버그”가 “대서양”을 횡단하면서 과학문명의 우수성을 증명했던 여객용 “제트기”나 화물용 “카고”와 달리 헬리콥터는 사람을 죽이는 전쟁 무기로 사용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가 헬리콥터에게서 “동양의 풍자”를 느낀다고 하면서, 헬리콥터를 “설운 동물(動物)”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전쟁에서 죽음의 도구로 사용되는 과학문명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생활난을 해결함으로써 인간에게 자유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과학문명이 “좁은 뜰”, “항아리 속”처럼 협소하게 전쟁 무기로 사용되어 슬프게도 인간을 죽이는 살상무기로 전락할 수 있다는 비판이다.
그에게 헬리콥터로 상징되는 과학문명은 “자유"인 동시에 "비애”이다. 과학문명은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생활난으로부터의 “자유”를 가져다 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에서 살상 무기로 사용되어 죽음의 “비애”를 초래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 연에서 그는 더 넓은 전망이 필요 없는 “무제한의 시간”을 제시한다. 그리고 “산도 없고 바다도 없는” 현실 생활의 한복판으로 들어가서 “앙상한 육체의 투명한 골격과 세포와 신경과 안구”까지 모조리 노출 낙하시켜 가면서 가볍게 날아가는 헬리콥터에게서 “긍지와 선의”를 느낀다.
지금은 과학문명의 폐해를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미래를 향한 더 넓은 전망 속에서 인간의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과학문명의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가 헬리콥터에게서 “자유의 정신의 아름다운 원형” 발견하는 것도 진정한 인간의 자유는 관념적인 정신의 차원이 아니라, 현실 생활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 주는 과학문명으로 가능하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자유의 마지막 파편”에 스스로 “겸손의 침묵”을 지켜가며 울고 있다는 말로 시를 마무리하는 것도 인간에게 죽음의 비애를 초래할 수도 있는 과학문명의 폐해를 제대로 인식하면서 겸손하게 자유의 측면을 살려나가야 한다는 뜻으로 보인다.
현실적인 생활로부터 자유를 누리기 위해 과학문명을 추구하되, 이것이 살상무기로 악용되어 죽음의 비애를 초래하지 않도록겸손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영진 교수는 린드버그가 “나치와 협력해 반유대주의 운동에 골몰했던 인물”이라는 이유로 그가 타지 않았던 헬리콥터는 “횡단과 정복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누군가를 돕고, 높은 곳에서 멈춰서 세상을 응시하는 데는 능한 기계”이고, “바로 이 정지의 운동 때문에 선망의 대상이었던 헬리콥터는 스스로도 서러운 존재로 이양되기 시작”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도 오 교수는 헬리콥터를 전쟁 무기로 설명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헬리콥터가 본격적으로 전장에 투입된 전쟁이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이동과 착륙이 간편한 헬리콥터의 운용은 변화가 많은 한국 산악 지형에 맞는 군사작전을 위해 필수적이었다.”
당시에 김수영은 헬리콥터가 정지하면서 세상을 응시하는 기계라기보다는 여객용 “제트기”나 화물용 “카고”와 달리 살상 무기로 활용되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마지막 연에서 그는 더 넓은 전망이 필요 없는 “무제한의 시간”을 제시한다. 그리고 “산도 없고 바다도 없는” 현실 생활의 한복판으로 들어가 “앙상한 육체의 투명한 골격과 세포와 신경과 안구”까지 모조리 노출 낙하시켜 가면서 가볍게 날아가는 헬리콥터에게서 “긍지와 선의”를 느낀다.
과학문명의 폐해를 비판만 하지 말고, 미래를 향한 더 넓은 전망 속에서 인간의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과학문명의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가 헬리콥터에게서 “자유의 정신의 아름다운 원형” 발견하는 것도 진정한 인간의 자유는 초월적 정신의 차원이 아니라, 현실적 생활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 주는 과학문명으로 가능하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가 헬리콥터를 보면서 “자유의 마지막 파편”에 스스로 “겸손의 침묵”을 지켜가며 울고 있다는 말로 시를 마무리하는 것도 인간에게 죽음의 비애를 초래할 수도 있는 과학문명의 폐해를 인식하면서 겸손하게 자유의 측면을 살려나가야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현실적인 생활로부터 자유를 누리기 위해 과학문명을 추구하되, 이것이 죽음의 도구로 악용되지 않도록 겸손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오영진 교수는 김수영이 「네이팜탄」(1955)에서 전쟁 무기인 네이팜탄을 시적 대상으로 삼은 것을 “네이팜탄의 위력적인 살상력이 아닌 그 강력한 운동의 에너지를 자신의 힘으로 전유”하려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가장 높은 곳에서 내리꽂는 폭탄의 운동은 그 내리꽂는 행위로써 어떤 깨달음의 순간”을 연상케 한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여기서도 김수영이 주목하는 것은 운동의 형태가 아니라, 헬리콥터와 마찬가지로 과학문명의 가치이다.
시의 첫머리에서 그는 “너를 딛고 일어서면 / 생각하는 것은 먼 나라의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너”는 한국전쟁 당시에 사용되어 우리의 가슴속에 “흐트러진 파편”을 남겼던 미국의 대량 살상무기 “네이팜탄”을 가리킨다.
그는 헬리콥터와 마찬가지로 네이팜탄조차도 과학문명으로 인정하면서, 그의 폐해를 딛고 일어서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그가 너를 “이기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자신의 “발”을 미워한다고 말하는 것은 네이팜탄이라는 과학문명 자체가 아니라, 이를 평화적으로 활용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뜻으로 보인다.
그리고 “방향은 애정”이라고 말하는 것도 네이팜탄으로 상징되는 과학문명이 전쟁 무기라는 ‘죽음의 도구’에서 현실적인 생활난을 해결해 주는 ‘애정의 도구’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이어서 그는 초월적인 세계를 상징하는 “구름”이 스쳐 지나가고, 이를 추구하던 “설움과 과거”는 전쟁 직후에 까마득하게 사라졌다고 하면서, 지금은 현실적인 생활난을 해결해야 하는 인간적 “애정”이 절박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과거와 미래”, 즉 초월성을 추구했던 “과거”에 못지않게 과학문명을 통한 “미래”의 발전이 중요하고, 과학문명의 “오류(誤謬)”에 못지않게 “혈액”, 즉 피처럼 필수적인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덧붙인다. 그래서 “근지러운 나의 살”, 즉 현실적이고 육체적인 생활을 위해 과학문명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밝힌다.
그는 과학문명의 발전을 통해 “거대한 파티 같은 풍성하고 너그러운 풍경”을 상상하면서, “투명하고 가볍고 쇳소리 나는 가벼운 잔”과 “지휘편(指揮鞭)”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아직 풍성한 파티를 즐길 정도로 과학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우리나라의 낙후된 현실을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과학문명이 “정치의 작전”, 즉 인간을 죽이는 전쟁 무기가 아니라 “애정의 부름”, 현실적인 생활난을 해결해 줄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조심을 다하여” 그의 “내부”를 살펴보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내부가 “이브의 심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바쁘기만 한 “기계”만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의 퇴적”이 “준엄한 태산”처럼 있다고 긍정한다. 과학문명이 전쟁 무기가 아니라, 인류 역사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조심해야 된다는 말이다.
그는 과학문명이 “죽음”의 도구인 전쟁 무기로 활용되는 것이나, 과학문명을 발전시키는 데에 막대한 “시간”이 드는 것이 싫지만, 이를 타고 가서 언제가 그날에 도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마지막 연에서 “창조를 위하여 / 방향은 현대-”라고 말하는 것도 우리가 나가야 할 방향은 “창조”를 가능하게 해 주는 “현대”의 과학문명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는 과학문명의 폐해를 인식하면서도 이를 부정하지 않고, 애정과 창조의 방향으로 전환할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김수영은 해방 이후 밀려드는 서양의 과학문명을 중요한 시적 대상으로 삼았던 모더니스트다.그런데 당시 모더니스트들 대부분이 엘리엇의 <황무지>처럼 문명 비판에만 몰두하고 있던 것을 생각하면, 과학문명의 가치를 긍정하는 그의 입장은 한국 문학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김수영 문학의 특징이자 가장 큰 미덕은 “사물로부터 배운다는 점”이 아니라, 과학문명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인간 정신이나 민족 전통과의 균형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김수영은 문명과 정신, 문명과 전통 사이에서 긴장을 추구했던 다원주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