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의 [거대한 100년 김수영] ⑥ 설움 <“제일 욕된 시간”과 “벌거벗은 긍지” 사이 생활고의 설움>에서 엄경희 교수는 김수영의 1950년대 시에 자주 나타나는 ‘설움’의 정서가 “일상생활로부터 배태된 정념”이라고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김수영이 “남들처럼 어려운 생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동을 하거나 해결책을 궁리하는 것을 유보”했다거나, “노동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생활로부터 비롯된 한가와 실의와 초조를 낱낱이 의식”했다는 설명은 일면적인 해석으로 보인다.
김수영은 시인으로서 초월적인 정신을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생활인으로서 현실적인 노동에도 충실하려고 노력했던 다원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엄경희 교수의 말처럼 김수영의 설움이 “생활 속에서 생활과는 다른 차원의 것을 소망하는 데서, 자신의 위대함을 입증하려는 열망”에서 비롯된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의 설움은 「구슬픈 육체」(1954)에서 분명히 제시했듯이 육체를 가진 인간의 조건에서 비롯된 근본감정이다. 마찬가지로 김수영의 1950년대 시에서 자유 또한 영혼을 가진 인간의 조건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가치이다.
「구슬픈 육체」에서 시적 화자는 불을 끄고 누웠다가 “잊어지지 않는 것”이 있어서 다시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 불을 켜고 앉았을 때는 이미 자신이 찾던 것은 없어졌을 때라고 덧붙인다.
그는 “반드시 찾으려고 불을 켠 것”이나 “없어지는 자체를 보기 위하여서만 불을 켠 것”이 아니고, “아까운지 아까웁지 않은지 헤아릴 사이도 없이” 불이 켜졌다고 하면서, 불을 켜고 다시 일어나는 것이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운 일임을 암시한다.
밤에는 영혼을 위하여 초월적인 “아름다운 통각(統覺)과 조화와 영원과 귀결”을 찾더라도, 낮에는 육체를 위하여 다시 일어나서 현실적인 생활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어둠 속에서 본 것이 “청춘”, “대지” 등의 초월적인 정신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초월적인 밤의 시간에는 “땅과 몸이 일체가 되기”를 바라고, “애처롭고 아름답고 화려하고 부박한 꿈”을 찾으려는 “불굴의 의지”를 다진다.
하지만 현실적인 낮의 시간에는 그동안 “잊어버린 생활”, “천상의 무슨 등대같이 까마득히 사라져버린 귀중한 생활”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비록 현실 생활이 “말 없는 생활”이고, 마지막에는 “무감각하게 될 생활”일지라도 낮의 시간에는 현실적인 생활을 귀중하게 여긴다.
물론 그는 시인으로서 초월적인 조화를 원하는 가슴으로 조화가 없어서 아름다운 현실 생활을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시인이라면 지나간 생활을 “헤어진 구슬픈 벗”처럼 여기고 “천사”처럼 흘려버리기 위해 불을 켜서는 안 된다.
하지만 천사와 달리 “쉴사이 없이 가야 하는 몸”, “구슬픈 육체”를 가진 인간은 불을 켤 수밖에 없는 구슬픈 존재임을 받아들인다. 아무리 시인이라 하더라도 육체를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현실 생활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엄경희 교수는 김수영의 「긍지의 날」(1954)에 나타나 있는 설움이 “생활과의 거리두기”로부터 야기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에 대한 긍지로 가득한 자가 취하는 자발적 소외”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여기서 ‘설움’은 생활과의 거리두기가 아니라, 반대로 육체를 가진 인간이 현실적인 생활 속에서 감내해야만 하는 실존적 아픔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시에서 그는 너무나 잘 아는 “순환의 원리”를 위하여 피로하였고, “영원히 피로할 것”이라고 말한다. 육체를 가진 인간은 하루하루 순환하는 현실 생활 속에 내던져져서 영원히 노동의 피로를 감내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구태여 옛날에 추구했던 초월적인 정신 대신에 현실 세계 속에서 “내가 살기 위하여” 감당해야 하는 실존적인 피로와 설움을 자신의 긍지로서 받아들인다.
김수영에게 긍지는 현실 생활과의 거리두기가 아니라, 반대로 현실의 생활난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인 “스스로 도는 힘”(달나라의 장난)을 갖추는 일이다.
시인으로서 현실 생활을 중시하는 것이 “이 시대를 진지하게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치욕”(구라중화)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긍지로 여기고 있다.
물론 그도 살기 위해서는 현실을 벗어나는 “번개 같은 환상”이나 “꿈”, “청춘, 물, 구름” 등의 초월적인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현실적인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한 노동의 피로가 자신의 “원천”이자 “최종점”인 긍지라고 거듭 강조한다.
“파도”처럼 요동하는 현실 속에서도 소리 없이 살 수 있고, “비”처럼 퍼붓는 현실 속에서도 젖지 않고 살 수 있는 기본적인 생존의 조건을 마련할 수 있는 생활력을 긍지로 삼는다.
마지막 연에서 그는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이고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이라고 하면서 피로와 긍지를 동일시한다.
그리고 생활난을 극복하기 위한 노동의 피로가 자신의 몸을 “한치를 더 자라는 꽃”처럼 아름다운 존재로 만든다고 강조한다.
그는 현실 생활공간 한복판에서 부대끼면서 느끼는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 오늘이 바로 “긍지의 날”이자 자신이 “자라는 날”이라고 선언하면서 자긍심을 드러낸다.
여기서 ‘설움’은 현실 생활을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뛰는 훈련을 받는 그러한 운명”(「토끼 」)을 지닌 존재로서 먹고살기 위해 뛰어야만 하는 인간의 실존적 조건으로 인한 아픔이다. 그는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초월적인 정신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생활의 피로와 설움도 중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에서는 현실적인 생활과 초월적인 정신 사이의 긴장이 나타난다. 그가 “정신의 결연함”을 통해 “생활 속에서의 뚜렷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고자 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적인 생활을 유보하거나 부정했던 정신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김수영은 영혼을 지닌 인간으로서 초월적인 정신을 추구하는 것 못지않게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현실적인 생활도 긍정하면서 그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추구했던 다원주의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