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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주 Sep 11. 2021

적 :  하… 그림자가 없다, 적, 절망

- 김수영의 다원주의(15)

적 : 하…… 그림자가 없다, 적, 절망


한겨레신문의 [거대한 100년 김수영] (16) 적 <짙은 자기 환멸을 내쉴지언정 내 조국을 미워할 수는 없었다>에서 심보선 교수는 김수영을 “위대하게 찌질한 시인”이라고 혹평하고 있다.


김수영은 지식인으로서는 위대하게 적과의 도덕적이고 지적인 싸움을 벌이면서도 시인으로서는 비루한 일상을 끝까지 미워하지 못하고 찌질하게 부여잡고 있었던 시인이라는 평가이다.

“세상을 ‘적과의 싸움’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 그 관점이 하도 집요해서 자신의 일상과 이웃에서 적을 발견하는 이, 하지만 그 적을 끝까지 미워할 수 없는 이, 그런데 그 관점이라는 것이 결국엔 생활이 아닌 서양 물이 든 책과 이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 자기 나라의 ‘거대한 뿌리’를 남의 나라의 ‘종이 나부랭이’로 사유하며 (자기)연민과 (자기)환멸에 젖는 이, 그가 김수영이다. 장담컨대 그런 종류의 “위대하게 찌질한” 시인은 다시는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먼저, 김수영이 세상을 ‘적과의 싸움’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서도 그 적을 끝까지 미워하지 못했다는 보선 교수의 비판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김수영은 애초부터 세상을 적과의 싸움으로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과의 도덕적이고 지적인 싸움을 벌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세상을 적과의 싸움으로 바라보는 진영주의자가 아니라, 반대로 적과 친구,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진영주의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던 다원주의자였다.


심 교수가 김수영을 위대하게 찌질한 시인이라고 평가 절하하는 것은 진보 진영에서 그를 소시민적 시인이라고 비판하는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앞서 김명인 교수가 참여시인과 혁명시인을 굳이 구분하면서, 김수영이 혁명시인일 수는 있지만 참여시인은 아니라고 규정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번에 심 교수는 김수영의 소시민성을 '찌질이'라는 아주 자극적인 용어로 바꾸면서 비판의 강도를 높이고 있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심 교수의 말처럼 늘 ‘적’을 분별하고, 그 적과 싸움을 벌이면서 자신의 정당함을 선포하는 집단은 지식인이 아니라 진영주의자들이다. 김수영이 제시했듯이 미래를 위해 적조차도 형제로 만들려고 애쓰는 것이 진정한 지식인의 자세이다.


더구나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시대에는 지적이고 도덕적인 방식으로 싸움을 한다고 해서 적대적인 진영논리가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오래 전에 소련에서 관제문학, 어용문학으로 전락한 사회주의 리얼리즘론에서 강조했던 당파성이야 말로 시대착오적인 진영논리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심보선 교수는 김수영이 1960년 3‧15 부정선거를 비판하면서 사월혁명 직전인 4월 3일에 탈고한 시 「하…… 그림자가 없다」에서도 "비루한 일상"이라는 이상한 적을 찾아낸다. 하지만 김수영은 이 시에서 비루한 일상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만나는 민주주의의 적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우리들의 “적”은 민주주의를 가장하면서 일상적인 “우리들의 곁”에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적들이 거시적인 사회정치적 차원이 아니라 “집안”이나, “직장”, “동리”처럼 미시적 생활 세계 속에 있다고 하면서 “전선(戰線)”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이어서 그는 민주주의의 적들이 일상생활 속에 숨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언제나’ 싸울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은 쉴 수가 없다고 거듭 강조한다. 민주주의의 적들이 우리의 생활 속에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은 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가 “우리들의 싸움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있다”라고 말하는 것도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은 구체적인 적들을 대상으로 분명한 전선에서 벌어지는 사회정치적 행동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실천해야 되는 주체적 차원의 행동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가 보이지 않는 적들과의 주체적인 싸움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이 “민주주의식”이다. 그는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이기 때문에 싸우는 방법도 당연히 민주주의식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당시의 산문 「자유란 생명과 더불어」에서 3‧15 부정선거로 인해 “현대 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자유의 하나”인 정치적 자유가 질식하고 있는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미국 시인 휘트먼을 인용하여 “자유란 것은 두 번째나 세 번째나 혹은 다섯 번째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맨 마지막으로 생명과 더불어 없어지는 것”이므로 정의를 갈구하는 이유에서 자기 몸을 항시 항거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는 “지성인”으로서 끝까지 싸울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그는 지성 도저히 폭력화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지성인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위한 싸움에서 “조리 있는 설득과 아름다운 이성으로 줄기차게 자기들의 맡은 각자의 천직을 고수”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는 “폭력”이 아니라 “진실성”을 가지고 “조용히 아름답게 그러나 강하게” 싸우는 것을 “지성인의 의무”로 제시한다.


그래서 이 시에서 제시된 “민주주의식”이라는 말폭력적인 방식에 대비되는 조리 있는 설득, 진실성, 아름다운 이성의 방식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에 그림자가 없다는 말도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과정에서 나타날 수도 있는 폭력적인 행태를 경계하면서 철저하게 민주주의 방식으로 혁명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보이지 않는 민주주의 적들과의 싸움은 폭력이 아니라 철저히 민주주의식으로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사월혁명의 격변기에도 민주주의적인 태도를 잃지 않으려 애썼던 지성인이다. 이 시에서 보이지 않는 적은 심 교수가 말하는 비루한 일상이 아니다.


그는 시인으로서 "자신의 실존 전체가 속한 삶의 익숙한 흐름과 공동체"를 거부하지 못하는 한계를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사월혁명 전야에 부정선거를 자행한 민주주의의 적들과의 싸움을 지성인답게 민주주의식으로 수행하겠다는 실천적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후에도 김수영은 '적'이라는 제목의 시들을 3편이나 발표했는데, 그 첫 작품이 1962년의 시 「적」이다. 이 시에서 그는 “더운 날”에는 “적(敵)”이 해면 같고, 자신의 “양심과 독기”를 빨아먹는 문어발 같다고 말한다.


여기서 “더운 날”은 가난을 상징하는 추운 날과 반대로 경제적으로 생활이 안정된 상태를 상징하고, “적(敵)”은 시인들이 적으로 삼는 돈을 상징한다.


더운 날, 즉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위해서는 초월적인 예술을 추구하려는 양심과 독기를 빨아먹는 돈을 적으로 삼지 말고 해면동물처럼 부드럽게 대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가 적은 “흡반같은 나의 대문의 명패보다도 정체 없는 놈”이라서 “더운 날”에는 “눈이 꺼지듯 적이 꺼진다”라고 말하는 것도 적어도 자기 집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생활이 안정되려면 돈을 적이 아니라 정체없는 놈으로 생각해야 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는 “항상 약삭빠른 놈”, “내심과 정반대되는 행동만” 하면서 돈을 벌려고 애쓰는 놈들도 모두 부하를 사랑하거나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더운 날에 “운산(運算)”해 보면 적은 아무 데에도 없다고 덧붙인다. 이것은 인간의 공통된 과제인 생활난 해결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돈을 벌기 위해 애쓰는 속물들도 자기의 부하나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애쓰고 있는 사람들이므로 적으로 삼을 수가 없다는 뜻으로 보인다.


저마다의 이유로 먹고 살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을 양심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어서 그는 “시금치밭에 앉는 흑나비와 주홍나비”처럼 자신의 “과거와 미래가 숨바꼭질”만 한다고 하면서, 시인으로서 과거에 추구했던 양심과 생활인으로서 미래를 위한 돈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적이 어디에 있느냐?”, “적은 꼭 있어야 하느냐?”라며 현실적인 생활을 위해 필수적인 돈을 꼭 적으로 삼아야 되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현실적인 생활에 필수적인 돈을 벌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까지 모두 적대시하는 초월적인 시인들을 향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현실 생활과 돈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그는 아직도 적이 늘비하지만 “더운 날”처럼 “어제의 적”은 없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자신이 “순사, 땅주인, 과속을 범하는 운전수”처럼 과도한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여전히 적으로 삼고 있지만, 극심한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돈을 벌려고 애쓰는 평범한 생활인들을 과거처럼 적으로 삼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보인다.


이후 김수영은 1965년에 다시 적을 제목으로 하는 시들을 발표한다. 「적1」은 전집 초판본과 3판본 모두 탈고일이 1965년 8월 5일로 되어 있고, 「적2」는 다음날일 8월 6일, 「절망」은 며칠 후인 8월 28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작품들은 1966년 《현대문학》 봄호에 「적2」, 「절망」, 「적1」의 순서대로 게재되었다.


먼저, 「적2」에서 그는 “제일 피곤할 때” 적에 대한다고 하면서 이를 “바위의 아량”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날이 흐릴 때” 정신의 집중이 생기는 것은 “신의 아량”이라고 덧붙인다.


이것은 날이 흐릴 때 정신의 집중이 필요하듯이 극심한 생활난으로 인해 피곤한 때에는 적에 대한 “아량”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보인다.

이 시는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이 조인되고, 그해 7월 14일 비준동의안이 단독으로 국회에 상정된 이후인 8월 6일에 탈고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백성들의 생활이 너무도 피곤하기 때문에 일본을 적으로 삼지 말고, 아량을 베풀면서 경제적인 교류를 할 때라는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다.

그는 이제 적인 ‘그=일본’은 패망해서 “사지의 관절”, “무릎하고 대퇴골”에 힘이 빠져 있고, 기존의 제국주의적 동맹 관계가 모두 해체되었으니 더이상 두려워할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일본을 적대시했던 “시(詩)”는 “쨍쨍한 날씨”, “청랑한 들”, “환락의 개울가”로 상징되는 해방된 시대에는 “버려진 우산”, “망각의 상기”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이제 해방이 되었으니 일본을 적대시하는 시가 아니라, 피곤한 생활난을 해결할 수 있는 시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어서 과거의 “성인(聖人)”들처럼 지금의 “눈이 뒤집힌 사람들”이 “처”를 적으로 삼는다고 비판한다. 우리에게 일본은 ‘처’와 같이 서로 사랑하면서 함께 살아가야 할 동반자인데, 이를 적으로 삼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그는 이를 “결별의 신호”라고 규정하면서, 일본을 적대시하는 고루한 민족주의자들과의 결별을 선언한다. 그가 “이조 시대의 장안에 깔린 기왓장 수만큼” 많은 것을 버렸다고 하면서, 가장 피로할 때 “가장 귀한 것”을 버린다고 말하는 것도 지금은 과거 이조 시대에 사로잡힌 편협한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민족’이라는 가장 귀한 것을 잠시 버려야 할 때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민족이 가장 귀한 것임은 분명하지만, 지금은 편협한 민족주의를 버리고 미래를 위해서 일본을 사랑스러운 아내로 여겨야 할 때라는 말이다.

그는 “흐린 날에는 연극은 없다”라고 하면서, 모든 게 쉬는데도 “처와 처들”, “애인”, “넝마”는 쉬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흐리고 피곤한 날, 즉 낡고 해어진 ‘넝마’ 같이 생활난에 허덕이는 상황에서는 가상의 연극이 아니라 현실 생활에 집중해야 한다는 뜻으로 보인다.


지금은 비현실적인 연극을 잠시 쉬고, ‘처’, ‘버림받은 애인’이나 ‘버림받으려는 애인’으로 상징되는 일본과 수교하여 생활난을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그는 제일 피곤할 때에 “가장 가까운 적”, “가장 사랑하는 적”을 대한다고 하면서, ‘적=일본’을 가장 가깝고도 사랑스러운 존재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우연한 싸움”, 즉 현실 세계 속에 우연히 던져진 인간의 실존적 조건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으로 제시한다.


일본이 우리에게 역사적으로 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지금은 극심한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사랑스러운 처로 삼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앞서 다른 글에서 밝혔듯이 1964년 6·3 한일수교반대운동 이후에 탈고한 「현대식 교량」에서도 김수영은 이미 일본을 적에서 형제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그는 여기서 “젊음과 늙음이 엇갈리는 순간”, “속력과 속력의 정돈” 속에서 “다리는 사랑을 배운다”라고 정리하면서, 늙은 과거에만 머물지 말고 젊은 미래를 위해 ‘다리=한일 수교’를 수용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한일수교가 미래를 위해 “적”을 “형제”로 만드는 “사랑”의 실증일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이제는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를 위해 적도 형제로 만들 수 있는 “정말 희한한 일”을 실천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다음으로,  「절망」에서 그는 “풍경”, “곰팡”, “여름”, “속도”, “졸렬과 수치”와 마찬가지로 “절망”도 끝까지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세계의 모든 부정적인 존재들은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시는 1965년 6월 22일 한일수교 협정이 조인되고, 8월 14일 국회에서 비준된 한일협정을 무효화하기 위해서 학생들의 시위가 격화되자 이를 막기 위해 박정희 정부가 8월 26일 서울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한 직후인 8월 28일에 탈고되었다.


그래서 반성하지 않는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것은 당시에 민주공화당 의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반민주적으로 한일수교 협정을 비준한 독재정부를 비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고 하면서 날치기로 통과된 한일수교가 생활난을 겪고 있는 민중들을 구원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버리지 않는다.


그는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독재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민중들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일수교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적1」은 한일기본조약 비준동의안이 단독으로 국회에 상정된 이후인 8월 5일에 탈고되었다. 여기서 그는 우리가 현실 속에서 무슨 적(敵)이든 적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 적에는 “가벼운 적”도 “무거운 적”도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의 적이 제일 무겁고 무서울 것 같지만, “오늘의 적”보다 약할 것 같은 “내일의 적”을 생각하면서 오늘의 적을 쫓으면 된다고 덧붙인다. 


그는 “이래서 우리는 태평으로 지낸다”라는 말로 시를 마무리한다. 이것은 지금은 일본이 제일 무겁고 무서운 적처럼 느껴지지만 미래에는 적이 아니라 형제나 처처럼 사랑스러운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뜻으로 보인다.


일본을 너무 무겁고 무서운 적으로 여기지 말고, 한일수교를 통해 적을 쫓아낸 것이라고 여기면서 “태평”하게 지내라는 말이다.

김수영이 민주주의의 적이나 역사적인 적을 시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사월혁명 당시에도 적에 대한 진영주의적 폭력을 거부하고 있고, 이후에는 “적이 어디에 있느냐?”, “적은 꼭 있어야 하느냐?”라고 항변하면서 역사적인 적인 일본마저 형제나 처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심보선 교수는 「거대한 뿌리」에서 김수영이 생활이 아닌 “서양 물이 든 책과 이념”에 뿌리를 두고, “자기 나라의 ‘거대한 뿌리’를 남의 나라의 ‘종이 나부랭이’로 사유하며 (자기)연민과 (자기)환멸에 젖는 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앞서 다른 글에서 밝혔듯이 이 시에서 김수영은 비록 서양 물질문명의 방향과 반대로 뒷걸음치더라도 인간과 사랑을 중시하는 민족의 전통을 추구하겠다는 “반동”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더구나 그는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와 /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라고 하면서, 서양의 비인간적이고 이기적인 문명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어떤 이데올로기도, 민족통일이나 중립도 의미가 없다고 강조한다. 이념이나 민족의 진정한 가치는 서양의 물질문명으로부터 전통적인 인간과 사랑을 지키는 데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심 교수가 “서양 이방인의 시선을 취할 때 비로소 자신의 삶을 사랑하게” 되는 “자기 오리엔탈리즘”을 김수영이 “뻔뻔하게” 드러내고 있다거나, 이로 인해 자기 나라의 역사에 대한 자기 연민과 자기 환멸에 젖어 있다는 평가를 어떻게 내릴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여기서 김수영은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월성이 아니라, 반대로 서양 문명에 대한 동양 정신의 우월성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김수영은 심보선 교수의 말대로 세상을 ‘적과의 싸움’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서도 그 적을 끝까지 미워하지 못했던 “위대하게 찌질한 시인”이 아니다. 반대로 적이 반드시 있어야 하느냐고 항변하면서, 적조차도 미래를 위해 형제나 처로 만들려고 애썼던 시인이었다.


김수영은 혁명과 일상, 생활과 양심, 적과 친구, 문명과 전통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보면서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진영주의자가 아니라, 양극단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추구했던 다원주의자이다.




하… 그림자가 없다(1960)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

우리들의 적은 커크 더글러스나 리처드 위드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악한이 아니다

그들은 선량하기까지도 하다

그들은 민주주의자를 가장하고

자기들이 양민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선량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회사원이라고도 하고

전차를 타고 자동차를 타고

요릿집엘 들어가고

술을 마시고 웃고 잡담하고

동정하고 진지한 얼굴을 하고

바쁘다고 서두르면서 일도 하고

원고도 쓰고 치부도 하고

시골에도 있고 해변가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고 산보도 하고

영화관에도 가고

애교도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우리들의 전선(戰線)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우리들 전선은 됭케르크도 노르망디도 연희고지도 아니다

우리들의 전선은 지도책 속에는 없다

그것은 우리들의 집안 안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직장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동리인 경우도 있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의 모습은 초토작전이나

<건 힐의 혈투> 모양으로 활발하지도 않고 보기 좋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언제나 싸우고 있다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밥을 먹을 때에도

거리를 걸을 때도 환담을 할 때도

장사를 할 때도 토목 공사를 할 때도

여행을 할 때도 울 때도 웃을 때도

풋나물을 먹을 때도

시장에 가서 비린 생선 냄새를 맡을 때도

배가 부를 때도 목이 마를 때도

연애를 할 때도 졸음이 올 때도 꿈속에서도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수업을 할 때도 퇴근시에도

사이렌 소리에 시계를 맞출 때도 구두를 닦을 때도…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있다


민주주의의 싸움이니까 싸우는 방법도 민주주의식으로 싸워야 한다

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

하… 그림자가 없다


하… 그렇다…

하… 그렇지…

아암 그렇구말구… 그렇지 그래…

응응… 응… 뭐?

아 그래… 그래 그래.


적(1962)          


더운 날

적이란 해면(海綿) 같다

나의 양심과 독기를 빨아먹는

문어발 같다     


흡반 같은 나의 대문의 명패보다도

정체 없는 놈

더운 날

눈이 꺼지듯 적이 꺼진다     


김해동 - 그놈은 항상 약삭빠른 놈이지만 언제나

부하를 사랑했다

정병일 - 그놈은 내심과 정반대되는 행동만

해왔고, 그것은 가족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였다

더운 날

적을 운산(運算)하고 있으면

아무 데에도 적은 없고     


시금치밭에 앉는 흑나비와 주홍나비모양으로

나의 과거와 미래가 숨바꼭질만 한다     

"적이 어디에 있느냐?"

"적은 꼭 있어야 하느냐?"


순사와 땅주인에서부터 과속을 범하는 운전수에까지

나의 적은 아직도 늘비하지만

어제의 적은 없고

더운 날처럼 어제의 적은 없고

더워진 날처럼 어제의 적은 없고     


적2(1965)     


제일 피곤할 때 적(敵)에 대한다

바위의 아량이다

날이 흐릴 때 정신의 집중이 생긴다

신(神)의 아량이다     


그는 사지의 관절에 힘이 빠져서

특히 무릎하고 대퇴골에 힘이 빠져서

사람들과

특히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련을 해체시킨다.     


는 쨍쨍한 날씨에 청랑한 들에

환락의 개울가에 바늘 돋친 숲에

버려진 우산

망각의 상기(想起)다     


성인(聖人)은 처(妻)를 적으로 삼았다

이 한국에서도 눈이 뒤집힌 사람들

틈에 끼여사는 처와 처들을 본다

오 결별의 신호여     


이조시대의 장안에 깔린 개왓장 수만큼

나는 많은 것을 버렸다

그리고 가장 피로할 때 가장 귀한

것을 버린다


흐린 날에는 연극은 없다

모든게 쉰다

쉬지 않는 것은 처와 처들 뿐이다

혹은 버림받은 애인뿐이다

버림받으려는 애인뿐이다

넝마뿐이다     


제일 피곤할 때 적에 대한다

날이 흐릴 때면 너와 대한다

가장 가까운 적에 대한다

가장 사랑하는 적에 대한다

우연한 싸움에 이겨보려고


절망(1965)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는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적1(1965)          


우리는 무슨 적(敵)이든 적을 가지고 있다

에는 가벼운 적도 무거운 적도 없다

지금의 적이 제일 무거운 것 같고 무서울 것 같지만

이 적이 없으면 또다른 적- 내일

내일의 적은 오늘의 적보다 약할지 몰라도

오늘의 적도 내일의 적처럼 생각되고     

오늘의 으로 내일의 적을 쫓으면 되고

내일의 적으로 오늘의 적을 쫓을 수도 있다

이래서 우리는 태평으로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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