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건주 Nov 27. 2021

다원주의 : 풀, 비

김수영의 다원주의(21)

다원주의 : 풀, 비


한겨레신문의 [거대한 100년 김수영] 26 풀 <풀은 ‘바람의 시’ 굳게 단힌 세계를 여는 힘>에서 유성호 교수는 풀과 바람을 대립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상응과 친화의 관계"로 설명한다. 하지만 풀을 민초로, 바람을 군사독재의 상징으로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양자 사이의 대립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해석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유성호 교수는 이제 바람을 억압의 힘으로 보고 풀을 억압에 저항하는 민초의 강인한 힘으로 간주하는 말하자면 풀과 바람을 적대적 대립 관계로 상정하는 알레고리적 해석은 종적을 감춘 것 같다고 본다. 그런데도 교육 현장에서 여전히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이라는 주제가 굳건하게 반복 재생산되고 있는 것을 학교 교육과 문학 연구가 현저하게 비대칭을 이루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비판한다.


유 교수는 풀과 바람을 대립 관계가 아니라 상응과 친화의 관계로 해석한다. 여기서 바람은 비를 몰아오는 존재이므로 "바람 때문이 아니라 바람 덕분에 풀이 울 수도 누울 수도 있었다는 사실은 ‘바람-풀’이 처음에는 능동과 수동, 원인과 결과, 자극과 반응 관계로 시작한 것"을 알려준다고 설명한다.


유 교수는 이후에 바람이라는 외인(外因)에 의해 수행된 움직임이 천천히 스스로 변화해가는 거대한 긍정의 과정으로 나아간다고 해석한다. <논어>에 있는 “풀 위에 그 바람이 있으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라는 말처럼 이제 "풀은 바람의 흐름에 종속되지 않고 스스로의 스케일과 속도와 존재방식을 얻어가는 과정적 존재로서의 자율성"을 보여주면서, 풀과 바람이 천천히 "상응과 친화의 관계"로 몸을 바꾸어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풀과 바람의 상응과 친화 관계를 통해 김수영이 독자들에게 던지는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유 교수는 이 작품 ‘민중들의 끈질긴 생명력’이라는 주제로 귀납되는 수렴형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통일된 주제의 압력으로부터 끊임없이 이탈하고 솟구치며 의미 확정의 요청을 거절하는 발산형의 작품이라고 규정한다. 이 작품은 "의미보다는 탈(脫)의미를 욕망하는 음악 자체", "의미론적으로 완벽하게 환원되지 않는 우주적 화음(和音)"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풀과 바람, 그리고 여러 동사들의 반복과 대구와 점층은 이 작품으로 하여금 단순하지만 여러 겹을 두른 한 편의 음악으로 태어나게끔 해준다. 이때 풀이 바람보다 늦게 눕고 울어도 먼저 일어나고 웃는다는 표현은 움직임의 선후 관계일 수도 있고 속도와 관련된 비교 관념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리듬을 육체화하면서 풀은 눕고 일어서고 울고 웃는다.
거대한 생명의 자율적 운동이 마지막에 이르러 “풀뿌리가 눕는” 것으로 표현된 것은, 천지인의 기운이 무수한 작용과 반작용을 통해 조화와 초월을 동시에 수행하는 경지를 자유자재로 보여준 최종 형식일 것이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존재 이유가 되고[自由], 스스로가 스스로를 존재케 하는[自在], 말하자면 우주의 기운이 꿈틀거리는 혼란의 반복을 수습하면서 시인은 고도의 질서를 구축해간다.


유성호 교수의 논리를 따라가 보면, 풀과 바람은 자연적 소재 그 자체로서 별다른 상징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유 교수는 바람이 "우주의 운동을 물질화한 가장 성스러운 기운의 기표"일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풀과 관련된 상징적 의미는 밝히지 않고 있다. 아니 무의미, 탈의미로 규정하면서 더 이상의 해석을 유보하고 있다. 유 교수는 우주적인 차원으로 고양된 생명의 자율적 운동, 즉 자유를 이 작품의 주제로 보고 있는 듯하다.


문제는 유 교수의 해석을 받아들이면, 이 시가 왜 김수영의 대표작인지 설명하기가 지 않다는 사실이다. 사물들 간의 상응과 친화 생명의 자율적 운동으로서의 우주적 자유를 김수영 시 전체의 핵심적인 사유로 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김수영이 현실 생활을 상징하는 풀과 초월적인 예술을 상징하는 바람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제시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이 작품이 상징주의적인 표현과 다원주의적인 긴장이라는 내용을 집약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에 김수영 시 전체의 본령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라고 본다. 


시의 첫 연에서 그는 “풀이 눕는다 /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 풀은 눕고 / 드디어 울었다 /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 다시 누웠다”라며 어느 비 오는 날 풀밭의 풍경을 묘사한다.


여기서 비를 몰아오는 바람은 초월적인 울음을 추구하는 인간의 영혼과 예술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힌다. 그는 산문 <반시론>(1968)에서 바람을 릴케의 「오르페우스에 바치는 송가」에 나오는 “신(神)의 안을 불고 가는 입김”이나 헤르더의 “신적인 입김”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풀은 현실적인 웃음을 추구하는 인간의 육체와 생활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는 육체와 영혼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이중적 존재로서 생활과 예술이라는 양극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추구해야만 하는 다원적인 인간 존재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비가 오고 흐린 날에 풀이 바람에 나부껴 눕고 울었다는 말은 비가 오는 날에는 육체적인 생활 세계에서 벗어나 정신적인 예술의 세계를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이해된다. 비가 와서 일을 할 수 없는 날에는 가만히 누워서 현실적인 생활에 사로잡혀서 먹고살기에 급급했던 속물적인 자신을 반성하면서 초월적인 정신과 예술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어서 그는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라는 새로운 풍경을 제시한다.     


이것은 비가 오는 날에는 영혼의 세계인 초월적인 정신과 예술을 추구하다가도 비가 그치면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서 육체의 세계인 현실 생활로 나서야 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바람으로 상징되는 초월적인 정신과 예술이 아무리 소중하더라도 육체를 가진 인간이 먹고살기 위해서는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서 현실 세계로 나가야만 한다는 말이다. 이를 사르트르식으로 말하면, 풀의 현실적인 ‘실존’이 바람의 초월적인 ‘본질’보다 우선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그는 풀이 눕고 일어나거나 울고 웃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그려 놓았다. 풀은 비가 오고 흐린 날에 발목까지, 발밑까지 누워 울면서 초월적인 정신과 예술을 추구하다가도, 비가 개고 맑은 날에는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서 현실적인 생활에 충실하면서 웃는다.


그는 초월적인 바람의 세계나 현실적인 풀의 세계 어느 하나에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인다. 날이 개면 논밭을 갈고 비가 오면 글을 읽는다는 청경우독(晴耕雨讀)의 생활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김수영은 이미 「비」(1958)에서도 이 시와 매우 흡사한 다원주의적 사유를 제시하고 있다. 「비」에서 초월적인 영혼을 추구하는 ‘비’가 「풀」에서는 비를 몰고오는 ‘바람’으로 변주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첫 연에서 “비가 오고 있다 / 여보 /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라고 묻는다. 여기서 비가 비애를 상징한다는 단서를 미리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비를 “명령하고 결의하고 평범하게 되려는 일” 가운데에서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투명한 움직임의 비애”라고 설명한다. 그는 비 오는 날을 현실적인 생활 속에서 살아가면서 느끼는 설움과 비애를 치유하는 초월적인 시간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것이 현대”라고 하면서, “현대가 현대를 죽이는 종교”, “현대의 종교는 출발에서 죽는 영예(榮譽)”라고 말한다. 이것은 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처럼 현대는 영원불변의 초월성을 추구하는 종교의 시대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순간을 추구하는 시대라는 뜻으로 읽힌다.


그가 “비 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를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도 영원불변의 초월성이 “자살”한 현대에는 비 오는 날이 초월적인 정신과 예술을 추구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비오는 날에는 일손을 멈추고 초월적인 정신과 예술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에 “결의하는 비애”, “변혁하는 비애”의 시간이자 “종교”의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계사(鷄舍) 위에 울리는 곡괭이 소리”,“동물의 교향곡”,“잠을 자면서 머리를 식히는  사색가”처럼 자신의 현실 생활 속에는 “너무나 많은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먹고살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지 않을 수 없자신의 생활에 대한 한탄으로 읽힌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연에서 비를 움직임을 통제하는 결의인 “움직이는 휴식”으로 규정한다. 비가 오면 일손을 멈추고 휴식을 취할 수밖에 없으므로 비오는 날은 움직임을 통제하여 초월적인 추구할 수 있는 휴식의 시간이라는 말이다. 결국 시인에게 비 오는 날은 현실 생활 속에서 느끼는 “움직이는 비애”를 치유할 수 있는 “움직이는 휴식”의 시간이 된다.


그는 마지막 연에서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 /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라는 단서를 남겨 놓았다. 이것은 비가 오는 것은 초월적인 정신과 예술을 추구하라는 명령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비 오는 날에는 움직임을 그만 두고 휴식을 취하면서 결의하고 변혁하는 힘을 주는 초월적인 정신과 예술을 추구하라는 말이다.


이 시에서도 그는 비가 오지 않는 날에는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쉴 새 없이 움직이다가도 비오는 날에는 잠시 쉬면서 인간적인 비애를 구원하기 위해 초월적인 정신과 예술을 추구하고 있다.  기서 이미 날이 개면 논밭을 갈고 비가 오면 글을 읽는다는 청경우독(晴耕雨讀)의 생활을 제시했었던 것이다.


김수영의 대표작인 '' 유성호 교수의 말처럼 흐린 날에 풀이 눕고 울고 일어나고 울고 웃고 궁극에는 눕는다는 리듬의 표현이 아니라, 비가 오는 흐린 날에는 누워서 울다가 날이 개면 다시 일어나서 웃는다는 다원주의로 축약될 수 있다.


이 시에서 풀과 바람은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상응과 친화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대립과 갈등의 관계다. 여기서 민초군사독재의 대립은 아니더라도 현실적인 생활과 초월적인 예술 사이에서 대립과 갈등을 읽을 수 있다.


김수영은 바람, 울음, 영혼, 예술을 추구하는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풀, 웃음, 육체, 생활의 가치도 긍정하면서 양극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추구했던 다원주의자이다.



풀(1968)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비(1958)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명령하고 결의하고

‘평범하게 되려는 일’ 가운데에

해초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투명한 움직임의 비애를 알고 있느냐

여보

움직이는 비애 알고 있느냐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것이 현대

현대가 현대를 죽이는 ‘종교’

현대의 종교는 ‘출발’에서 죽는 영예

그 누구의 시처럼    


그러나 여보

비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를

사랑하라

비가 오고 있다

움직이는 비애여    


결의하는 비애

변혁하는 비애……

현대의 자살

그러나 오늘은 비가 너 대신 움직이고 있다

무수한 너의 ‘종교’를 보라   


계사(鷄舍) 위에 울리는 곡괭이소리

동물의 교향곡

잠을 자면서 머리를 식히는 사색가

─모든 곳에 너무나 많은 움직임이 있다   


여보

비는 움직임을 제(制)하는 결의

움직이는 휴식    


여보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

작가의 이전글 사랑 : 사랑의 변주곡, 나의 가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