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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주 Nov 19. 2021

사랑 : 사랑의 변주곡, 나의 가족

- 김수영의 다원주의(20)

사랑 : 사랑의 변주곡, 나의 가족


한겨레신문의 [거대한 100년, 김수영] (25) 사랑 <시 쓰기란 ‘사랑’ 대주제의 변주곡…‘소음’이 사랑으로 혁명으로>에서 김수이 교수는 사랑의 가치와 방법이 김수영 시인이 일찍부터 파고든 삶의 문제였다고 설명한다.     


김수이 교수는 4·19 혁명이 좌절된 군부독재 치하에서 김수영이 사랑을 “인간이 유한한 삶에서 무한히 성장할 수 있는 ‘힘’으로 재인식”한다고 본다. 김수영에게서 힘=시의 원천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상처와 결함의 인간이 지닌 무한의 에너지이자 능력이다. 사랑은 영역과 한계를 알지 못한다. 사랑을 배우는 동안 인간은 성장하고, 사회와 역사는 향상하며, 현재는 지금-여기에서 다른 시간과 공간을 관통한다.”     


김 교수는 김수영의 핵심 용어인 사랑, 자유, 혁명 등은 서로 얽혀 있어, 다른 것과의 연관 속에 의미를 갖는 이중성을 띤다고 본다. 그리고 현실의 갖가지 소음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사랑을 배운다고도 설명한다.


 “소음은 한국의 후진적인 현실만이 아닌, 문학과 자연과 존재 등 삶의 모든 차원에 있다. 김수영은 갖가지 소음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사랑을 배운다. 그는 소음을 사랑으로 듣고, 자신이 직접 사랑의 소음을 발성한다. 사랑을 배우는 일이란 곧 새로운 시를 쓰는 일이며,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김 교수는 김수영의 시 쓰기가 ‘사랑’의 대주제를 변주해 현실의 소음을 혁명의 침묵으로 빚어내고, 다시 자연과 존재의 근원적인 침묵을 향하는 끝없는 과정으로 요약한다.

   

이런 맥락에서 김 교수는 「사랑의 변주곡」(1967)을 “다양한 존재와 공간, 시간을 차별 없이 연결하는 ‘사랑의 운동’의 현장”으로 해석한다.


“라디오 소리에서 출발한 사랑의 변주곡은 침묵의 속삭임이 되어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퍼져나가고, 어느새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다시 밀려닥친다. 사랑의 주파수에 맞추어진 세상은 지금 같은 에너지의 흐름 속에 있다. 흐르는 사랑의 에너지는 강, 산, 기차, 숲, 방, 할머니, 심부름하는 놈, 봄베이, 뉴욕, 먼 날 등을 사랑의 장(場)으로 연결한다. 끊어짐을 뜻하는 ‘간단’(間斷)도 빠뜨리지 않는다. 다양한 존재와 공간, 시간을 차별 없이 연결하는 ‘사랑의 운동’의 현장이 여기에 있다.”


이 시에서 김수영은 부패한 현실과 타락한 문명에 굴복했던 우리의 욕망을 극복하고 사랑으로 끊임없이 도약하려는 노력을 통해 욕망을 사랑으로 변주하는 사랑의 작업을 제시하고 있다는 이다.     


“시 ‘사랑의 변주곡’에서 사랑의 음악은 혼란의 소음과 흡사하며, 깊은 고요를 품고 있다.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시의 처음을 압도하는 것은 단호한 명령과 선언이다. 이 목소리는 욕망의 입에서 쏟아진 삶의 생음(生音)을 사랑의 음악으로 변주하려는 강렬한 결의를 전달한다. 인간의 본능인 ‘욕망’을, 타자를 향한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사랑’으로 고양하는 비법은 ‘발견’의 행위다. 그런데 발견은 무한히 갱신되는 것이기에, 욕망을 사랑으로 변주하는 작업은 끝없이 계속되어야만 한다.”


김 교수는 김수영이 4·19 혁명에서 배웠다고 말하는 “사랑을 만드는 기술”욕망에서 사랑으로 끊임없이 도약하여 욕망의 도시를 사랑의 위대한 도시로 만드는 기술이라고 다.


바로 이것이다. 욕망의 어두운 현실에서 사랑의 빛나는 현재를 계속 발견하고 재창조하는 기술. “눈을 떴다 감는 기술”. 부패한 현실과 타락한 문명에 굴복했던 우리가 욕망에서 사랑으로 끊임없이 도약할 때, 그 사랑의 아슬아슬한 절도를 열렬히 유지할 때,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은 “소음과 광증(狂症)과 속도와 허위”(‘시골 선물’)의 도시에서 “사랑의 위대한 도시”로 재탄생할 수 있다.     


하지만 김수영이 이 시에서 강조하는 것은 운동의 에너지이자 흐름의 이미지로 형상화된 추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현실적인 욕망과 초월적인 사랑 사이의 긴장과 균형이다.  초월적인 사랑과 침묵을 추구하는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시끄러운 소음과 욕망으로 가득 찬 현실 생활을 부정하지 않았다.


사랑의 변주곡이라는 제목도 사랑이라는 주제와 욕망이라는 변주로 구성된 시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어떤 주제를 설정하고, 그것을 여러 가지로 변형하는 기법을 변주라고 하며, 주제와 몇 개의 변주로 이루어지는 곡을 변주곡이라고 한다. 그는 욕망을 부정하면서 사랑으로 도약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욕망을 초월적인 사랑이라는 대주제의 변주로서 긍정하고 하고 있는 것이다.


김수영은 시의 첫머리에서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 사랑을 발견하겠다.”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현실적인 욕망을 긍정하면서 그 속에서 초월적인 사랑을 추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     


그가 “도시의 끝”에서는 사그러져 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삼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는 “쪽빛 산”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도시 너머에 자연이 있는 것처럼 현실적인 욕망 속에 내재하는 자연적인 인간 본성인 사랑을 발견하겠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여기서 “사랑하는 암흑”이 현실적인 낮의 시간과 대립되는 초월적인 밤의 시간을 상징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현실적인 시간인 낮에는 도시의 욕망을 추구하더라도, 초월적인 시간인 밤에는 인간의 자연적 본성인 사랑을 추구하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는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쪽빛 산이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초월의 시간인 밤에는 욕망을 추구하느라 겪었던 낮의 슬픔이 산처럼 커지므로 돼지우리의 밥찌끼처럼 먹고사는 문제에만 골몰했던 서울이라는 도시를  무시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래서 그는 “이제”, 즉 초월의 시간인 밤에는 “가시밭, 넝쿨장미의 기나긴 가시 가지까지도 사랑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라고 감탄하면서 초월적인 밤의 시간에 숲처럼 밀려닥치는 사랑을 만끽한다.     


그는 “사랑의 음식은 사랑”이라고 하면서,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는 열렬하다고 말한다.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면, 욕망의 음식은 욕망이다. 이렇게 사랑과 욕망은 각각의 음식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절도나 절제(봄밤)가 중요하다.     


낮에는 욕망의 음식을 구하기 위해서 현실적인 욕망을 열렬히 추구하면서, 밤에는 사랑의 음식을 구하기 위해 초월적인 사랑을 열렬히 추구하는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지 않는 절도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는 “간단(間斷)도 사랑”이라고 하면서, “암흑” 속을 “사랑이 이어져 가는 밤”을 안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눈을 떴다 감는 기술”이라고 덧붙인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사랑의 기술은 간단의 기술, 즉 눈을 떴다가 감았다가 하면서 절도를 지키는 기술이다.


현실의 시간인 낮에는 눈을 떠서 욕망을 추구하고, 초월의 시간인 밤에는 눈을 감고 다시 사랑을 이어나가는 절도 있는 태도가 바로 사랑을 만드는 기술이라는 말이다. 결국 욕망의 입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는 기술은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글을 읽는 주경야독(晝耕夜讀)처럼 낮과 밤, 도시와 자연, 욕망과 사랑, 생활과 예술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절도이다.      


그는 이러한 사랑의 기술을 “불란서 혁명”과 “4·19” 혁명에서 배웠다고 덧붙인다. 이것은 「푸른 하늘을」에서 제시했던 혁명과 고독 사이의 절도를 뜻하는 것으로 읽힌다. 사월혁명 당시에도 현실의 시간인 낮에는 눈을 뜨고 사회적 혁명을 추구하다가 초월의 시간인 밤에는 눈을 감고 시적인 고독을 추구하면서 사랑의 절도를 실천했었다는 말이다.     


다만 사월혁명 당시에는 소리 내어 외쳤다면 지금은 생활 속에서 사랑의 절도를 조용히 실천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그는 사랑과 욕망, 혁명과 고독을 모두 긍정하면서 그 사이에서 절도 있게 긴장과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인 방법을 사랑의 기술이라고 명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 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을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에 비유해서 예찬한다. 여기서 ‘간악(侃諤)’이라는 말은 성격이 곧아 거리낌 없이 바른말을 다는 뜻이다. 마치 달콤한 과육 속에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가 들어 있는 것처럼 현실적 욕망의 도시 속에도 초월적인 고요함과 사랑이 만들어 놓은 곧고 아름다운 신념이 단단하게 들어 있다는 말이다.     


그는 자신이 들어가서 묻혀 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욕망의 도시인 “봄베이”, “뉴욕”, “서울” 개미에 불과하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자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현실적인 욕망의 도시에 속에 내재해 있는 초월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마지막 연에서 그는 아들에게 “광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라고 당부한다. 이것은 초월적인 사랑만을 추구하는 광신적인 태도를 버리고, 초월적인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는 현실적인 욕망에도 충실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지금은 현실적인 욕망을 부정하면서 초월적인 사랑만 추구하는 광신에 빠지지 말고, 현실적인 욕망을 긍정하면서 그 욕망의 입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는 절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물론 그는 미래 언젠가 “인류의 종언”의 날이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는 “도시의 피로”에서 이 “단단한 고요함”인 사랑을 배울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라고 외치면서, 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미래에는 ‘인류의 종언’을 막기 위해 사랑을 추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는 “그것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 /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라는 말로 시를 마무리한다. 지금 문명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 아버지의 시대에는 욕망 대신에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 그릇된 명상일지도 모르지만, 미래 문명이 고도로 발전하게 될 아들의 시대에는 인류의 종언을 막기 위해 사랑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이다.     


달리 말하면, 지금은 문명과 정신, 욕망과 사랑 사이에서 절도 있게 긴장과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라는 말이다. 그는 여기서 현실적 욕망과 초월적 사랑 사이에서 절도 있게 긴장과 균형을 추구하려는 다원주의적 태도를 드러낸다볼 수 있다.


한편, 김수이 교수는 ‘사랑의 변주곡’(1967)이 적잖은 시차를 두고 ‘나의 가족’(1954)과 대칭 구도를 이룬다고 하면서, 두 시가 “사랑을 운동의 에너지이자 흐름의 이미지로 형상화한 공통점”을 지닌다고 설명한다.


“‘나의 가족’에서 “모든 가족의 입김이 합치어진” 사랑의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은 집안에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이 시에서 김수영이 가족들이 밖에서 묻혀온 사랑의 기운을 누리는 수혜자의 위치에 있는 반면, ‘사랑의 변주곡’에서 그는 자신이 만든 사랑의 에너지를 세상에 퍼뜨리는 적극적인 존재로 성장해 있다.”      


하지만 김수영이 두 작품에서 강조하는 것은 운동의 에너지이자 흐름의 이미지로 형상화된 추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현실적인 욕망과 초월적인 사랑, 현실적인 가족과 인류적 사랑 사이의 긴장과 균형이다.

김수영은 「나의 가족」에서 “고색이 창연한 우리 집에도 / 어느덧 물결과 바람이 / 신선한 기운을 가지고 쏟아져 들어왔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변화의 “물결과 바람”이 “신선한 기운”을 가지고 쏟아져 들어왔다는 말은 “이렇게 많은 식구들”이 현실 생활에서 자리를 잡고 아침에 나가서 일하다 저녁에 들어올 때마다 “먼지”처럼 작지만 그래도 돈을 벌어오기 때문에 다소나마 생활에 여유가 생겼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는 가족을 장구한 세월 동안 “파도”처럼 옆으로 흘러가고, “세대” 간에 이어지는 오랜 역사를 지닌 “억세고도 아름다운 색깔”이라고 긍정한다. 그리고 “가족의 입김이 합치어진 것” 즉, 가족의 사랑이 “겨울바람”보다도 자신의 눈을 밝게 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시인은 가족들이 떠드는 소리도 귀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그들에게 자신의 “전령(全靈)”을 맡겼음을 밝히면서, 현실적이고 이기적인 가족의 사랑을 대단히  긍정한다.

물론 그가 「너를 잃고」에서 제시한 것처럼 민족과 인류를 향한 “위대”한 사랑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지금도 “위대한 고대조각의 사진”을 보면서 초월적인 정신을 추구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성스러운 향수와 우주의 위대감”도 “가족들의 기미 많은 얼굴”에 비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초월적인 예술과 정신이 아무리 위대하다고 해도 현실적인 가족의 사랑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는 제각각 자기 생각에 빠져 있으면서 부자연스러운 곳이 없는 가족의 “조화와 통일”을 무엇보다 강조한다. 그리고 “유순(柔順)한 가족”들이 모여서 “죄 없는 말”을 주고받는 현실 생활공간인 “방”에서 차라리 “위대한 것”, “위대의 소재”를 생각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전쟁 직후 생활난이 극심한 상황에서는 위대한 사랑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사랑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뜻이다.          

그는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시를 마무리한다. 이것은 “거칠기 짝이 없는” 가족의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을 낡아도 좋은 “사랑”이라고 긍정하는 말로 이해된다. 지금은 위대한 사랑보다 현실적인 가족에 대한 이기적인 사랑이 더욱 소중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그가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라고 단언하지 않고 질문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자신이 가족의 사랑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그는 위대한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사랑도 긍정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김수영의 시에서 사랑은 가족이나 민족, 인류에 대한 사랑 등 공동체의 핵심 과제를 의미한다. 그는 가족의 사랑을 현실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으로, 민족과 인류에 대한 사랑을 초월적이고 위대한 사랑으로 인식한다. 리고 한편으로는 시인으로서 위대한 사랑을 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생활인으로서 현실적인 가족의 사랑도 긍정했다.        


김수영은 사랑과 욕망, 예술과 생활, 침묵과 소음, 문명과 정신, 위대한 사랑과 가족의 사랑 을 모두 긍정하면서 양극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추구했던 다원주의자이다.           



나의 가족(1954)            


고색이 창연한 우리 집에도

어느덧 물결과 바람이

신선한 기운을 가지고 쏟아져 들어왔다       

        

이렇게 많은 식구들이

아침이면 눈을 부비고 나가서

저녁에 들어올 때마다

먼지처럼 인색하게 묻혀가지고 들어온 것       

  

얼마나 장구한 세월이 흘러갔던가

파도처럼 옆으로

혹은 세대를 가리키는 지층의 단면처럼 억세고도 아름다운 색깔―           

    

누구 한 사람의 입김이 아니라

모든 가족의 입김이 합치어진 것

그것은 저 넓은 문창호의 수많은

틈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겨울바람보다도 나의 눈을 밝게 한다       

        

조용하고 늠름한 불빛 아래

가족들이 저마다 떠드는 소리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 전령(全靈)을 맡긴 탓인가

내가 지금 순한 고개를 숙이고

온 마음을 다하여 즐기고 있는 서책은

위대한 고대조각의 사진     

          

그렇지만

구차한 나의 머리에

성스러운 향수(鄕愁)와 우주의 위대감을 담아주는 삽시간의 자극을

나의 가족들의 기미 많은 얼굴에 비하여 보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제각각 자기 생각에 빠져 있으면서

그래도 조금이나 부자연한 곳이 없는

이 가족의 조화와 통일을

나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냐               


차라리 위대한 것을 바라지 말았으면

유순한 가족들이 모여서

죄 없는 말을 주고받는

좁아도 좋고 넓어도 좋은 방 안에서

나의 위대의 소재(所在)를 생각하고 더듬어보고 짚어보지 않았으면             

  

거칠기 짝이 없는 우리 집안의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

이것이 사랑이냐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     

          

사랑의 변주곡(1967)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삼월을 바라보는 마른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은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節度)는

열렬하다

간단(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 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불란서 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 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 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광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 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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