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수영의 다원주의(22)
“이성을 부인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혁명이 우리나라의 시의 경우에 어느 만큼 실감 있게 받아들여졌는가를 검토해 보는 것은 우리의 시사에서 커다란 하나의 숙제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시에 있어서는 의식의 증인이 없다. 그러나 무의식의 시가 시로 되어 나올 때는 의식의 그림자가 있어야 한다. 이 의식의 그림자는 몸체인 무의식보다 시의 문으로 먼저 나올 수도 없고 나중 나올 수도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동시(同時)다. 그러니까 그림자가 있기는 하지만 이 그림자는 그림자를 가진 그 몸체가 볼 수 없는 그림자다.”
“초현실주의 시대의 무의식과 의식의 관계는 실존주의 시대에 와서는 실존과 이성의 관계로 대치되었는데, 오늘날의 우리나라의 참여시라는 것의 형성 과정에서는 이것은 이념과 참여의식의 관계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다.” “진정한 참여시에 있어서는 초현실주의 시에서 의식이 무의식의 증인이 될 수 없듯이, 참여의식이 정치 이념의 증인이 될 수없는 것이 원칙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일에 그림자 따위는 필요 없다. 온몸은 무엇도 ‘의식’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으며, ‘염두’에 두지 않는다. 시인 자신은 의식적으로 무장된 실천적 지식인이어야 하되, 시를 쓰는 작업 자체는 그 의식에 얽매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무의식적 투신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런 종류의 시는 ‘문화와 민족과 인류를 염두에 두는’ 일반적인 의미의 참여시와는 그 출발점부터가 다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바로 그와 같은 온몸의 시야말로, 문화와 민족과 인류와 평화에 공헌하는, 진정한 참여시일 수도 있다는 것. 이제 우리는 이것을 ‘무의식적 참여시’라고 부르면서, 바로 이곳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온몸으로 동시에 무엇을 밀고 나가는가. 그러나-나의 모호성을 용서해 준다면-‘무엇을’의 대답은 ‘동시에’의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되고, 이 말은 곧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시론도 이제 온몸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순간에 와 있다.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시인은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라는 나의 명제의 이행이 여기 있다. 시도 시인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여러분도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그것을…….”
“산문이란, 세계의 개진이다. 이 말은 사랑의 유보(留保)로서의 ‘노래’의 매력만큼 매력적인 말이다. 시에 있어서의 산문의 확대작업은 ‘노래’의 유보성에 대해서는 침공(侵攻)적이고 의식적이다. 우리들은 시에 있어서의 내용과 형식의 관계를 생각할 때, 내용과 형식의 동일성을 공간적으로 상상해서, 내용이 반, 형식이 반이라는 식으로 도식화해서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노래’의 유보성, 즉 예술성이 무의식적이고 은성적(隱性的)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반이 아니다. 예술성의 편에서는 하나의 시작품은 자기의 전부이고, 산문의 편, 즉 현실성의 편에서도 하나의 작품은 자기의 전부이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