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건주 Nov 06. 2021

김수영의 온몸의 시론

- 김수영의 다원주의(22)

김수영의 온몸의 시론


한겨레신문의 [거대한 100년, 김수영] (23) 온몸 <김수영…무의식의 힘을 믿은 그는, 온몸으로 시를 썼다>에서 신형철 교수는 김수영이 ‘온몸의 시인’임을 다시 확인한다.


신형철 교수는 온몸의 시론을 무의식을 추구하는 초현실주의 시론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김수영의 온몸의 시론은 무의식과 의식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시론이라고 할 수 있다.   


신 교수는 김수영이 프로이트에 대해 언급한 <참여시의 정리>(1967)에서 온몸이라는 개념의 실마리를 찾는다. 신 교수는 여기의 몸체를 온몸의 시론에서 말하는 몸과 동의어로 이해한다.


그리고 김수영의 ‘몸과 그림자’는 ‘무의식과 의식’의 관계라고 하면서, “둘 중 더 중요한 것은, 아니 먼저인 것은, 무의식이다. 몸이 있어야 그림자도 있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이성을 부인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혁명이 우리나라의 시의 경우에 어느 만큼 실감 있게 받아들여졌는가를 검토해 보는 것은 우리의 시사에서 커다란 하나의 숙제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시에 있어서는 의식의 증인이 없다. 그러나 무의식의 시가 시로 되어 나올 때는 의식의 그림자가 있어야 한다. 이 의식의 그림자는 몸체인 무의식보다 시의 문으로 먼저 나올 수도 없고 나중 나올 수도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동시(同時)다. 그러니까 그림자가 있기는 하지만 이 그림자는 그림자를 가진 그 몸체가 볼 수 없는 그림자다.”     


하지만 구체적인 몸을 추상적인 무의식과 동의어로 보는 해석은 상식적이지 않다. 여기서 몸체는 몸이 아니라 본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시 쓰기에서 의식이 그림자라면, 무의식은 그림자가 붙어 있는 몸체=본체라는 비유이다. 무의식은 온몸의 시론에서 말하는 몸이 아니라 몸체=본체인 것이다.


여기서 김수영이 강조하는 내용도 무의식 의식의 동시성이다. 그는 1950년대 모더니즘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이성을 부인한 스타일”로 오해해서 제대로된 문명 비판을 수행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몸과 그림자의 비유를 통해 무의식과 의식의 동시성을 주장한다.


의식과 무의식은 몸체와 그림자처럼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인데, 이를 억지로 떼내어서 의식을 버리고 무의식만 추구했다고 박인환 등의 모더니즘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신형철 교수는 몸을 무의식만이 아니라 이념과 동의어라고까지 해석한다. 그런데 추상적인 이념을 구체적인 몸으로 간주하는 해석은 너무도 비상식적이다.


신 교수는 김수영이 말하는 이념이 특정한 집단에 의해 의식적으로 추구되는 구체적인 이데올로기로 축소될 만한 것이 아니고, “모든 전위 예술가의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이자 (이성이 아니라) 실존 그 자체인, 그러므로 ‘몸’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어떤 근원적인 반체제성”이라고 본다.


“초현실주의 시대의 무의식과 의식의 관계는 실존주의 시대에 와서는 실존과 이성의 관계로 대치되었는데, 오늘날의 우리나라의 참여시라는 것의 형성 과정에서는 이것은 이념과 참여의식의 관계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다.” “진정한 참여시에 있어서는 초현실주의 시에서 의식이 무의식의 증인이 될 수 없듯이, 참여의식이 정치 이념의 증인이 될 수없는 것이 원칙이다.”


김수영은 이미 「독자의 불신임」(1960)에서 이념을 민족과 인류의 이념으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진정한 문학의 본질은 개혁적인 시기에 처해 있을수록 그 가치가 더한층 발휘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혁명이란 이념에 있는 것이요, 민족이나 인류의 이념을 앞장서서 지향하는 것이 문학인”이라고 쓰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처럼 이념이나 영혼이 필요한 시기에 젊은 독자들에게 버림을 받는 문학인이 문학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이념을 인간의 ‘영혼’과 동의어로 사용한다. 그가 말하는 이념은 육체적인 몸이 아니라 아니라 인간의 영혼인 것이다.


여기서 김수영은 당시의 참여시가 이념이 아니라 참여의식만 내세우고 있다고 비판한다. 보편적인 이념과의 관계 속에서 참여의식을 제시하는, “국내의 사건을 세계 조류의 넓은 시야 위에서 명확하고 신랄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주는 진정한 참여시가 아니라, “사회의 일시적인 유동적 현실”에만 집중하는 “참여시라는 이름의 사이비 참여시”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몸과 동일시되는 이념이 아니라, 세계적인 발언을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념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추상적인 이념을 구체적인 몸과 동일시하는 것은 오해이다.


한편, 신형철 교수는 김수영이 <시여 침을 뱉어라>(1968)에서 제시한 온몸의 시론을 몸(무의식)으로 밀고 나가는 시 쓰기”라는 초현실주의 시론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몸을 그림자인 의식에 얽매이지 않은 무의식적 투신을 뜻한다고 보면서 온몸의 시론을 의식을 배제한 무의식적 참여시”라고  부른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일에 그림자 따위는 필요 없다. 온몸은 무엇도 ‘의식’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으며, ‘염두’에 두지 않는다. 시인 자신은 의식적으로 무장된 실천적 지식인이어야 하되, 시를 쓰는 작업 자체는 그 의식에 얽매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무의식적 투신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런 종류의 시는 ‘문화와 민족과 인류를 염두에 두는’ 일반적인 의미의 참여시와는 그 출발점부터가 다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바로 그와 같은 온몸의 시야말로, 문화와 민족과 인류와 평화에 공헌하는, 진정한 참여시일 수도 있다는 것. 이제 우리는 이것을 ‘무의식적 참여시’라고 부르면서, 바로 이곳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온몸의 시론은 의식을 배제한 무의식적인 시론이 아닐 뿐더러 사회적 참여의식을 강조하는 참여시론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신 교수의 오해는 <참여시의 정리>에서 파악했던 몸=무의식과 그림자=의식의 구도를 여기에 그대로 적용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여기서 온몸은 무의식을 가리키는 몸체가 아니라, 무의식과 의식이 하나로 합쳐진 말 그대로 온몸이다. 온몸이라는 말은 무의식과 의식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양극을 모두 한 몸처럼 추구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개념이다.


여기서는 그림자도 의식 전체가 아니라 협소한 참여의식을 가리킨다. 온몸의 시론은 시의 형식인 무의식과 내용인 의식을 모두 긍정하면서 양극 사이에서 긴장을 추구하는 다원적 시론이다.


먼저 그는 시의 형식을 무의식(예술성)으로 규정한다. 그는 명석한 의식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하면서, 시에 대한 자신의 모호성인 무의식이 무한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위한 유일한 도구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시의 형식 차원에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을 사랑이라고 규정한다. 이것은 온몸으로 인간의 보편적 이념인 사랑을 추구하라는 뜻으로 보인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온몸으로 동시에 무엇을 밀고 나가는가. 그러나-나의 모호성을 용서해 준다면-‘무엇을’의 대답은 ‘동시에’의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되고, 이 말은 곧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가 “시의 예술성이 무의식적”이라거나 “시인은 자기가 시인이라는 것을 모른다.”라고 반복하는 것도 시의 형식은 시의 기교가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따라서 시의 형식 차원에서 온몸의 시론은 기교가 아니라 무의식적인 사랑을 추구하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반면에 그는 시의 내용이 “시를 논한다”라는 산문 차원에서의 “모험”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이를 하이데거의 대지의 은폐와 대립되는 “세계의 개진”으로 설명한다.


그가 모험의 의미를 탐구한 결과로 “참여시의 옹호자”라는 부적절한 호칭을 받고 있다고 덧붙이는 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시의 내용은 일시적이고 유동적인 사회 현실이 아니라, 하이데거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 나가는 모험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그는 현대에서 “의식이 없거나 혹은 지극히 우발적이거나 수면 중에 있는 시인”을 현대적인 시인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모험의 발견으로서 자기 형성의 차원에서 그의 <새로움>”, “여태껏 없었던 세계가 펼쳐지는 충격”을 제시하는 것을 문학자의 의무로 제시한다.


그는 내용의 면에서 의식의 “자유”를 계속 제기하는 것이 “38선을 뚫는 길”이자 “민족의 역사의 기점”을 만드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시의 내용인 모험은 “자유의 서술도 자유의 주장도 아닌 자유의 이행”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내용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형식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면서, “새로운 문학에의 용기”를 거듭 강조한다.


결국 김수영이 시의 내용으로 제시한 모험은 의식적 자유를 의미한다. 따라서 시의 내용 차원에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은 온몸으로 의식적 자유를 추구하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 시론도 이제 온몸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순간에 와 있다.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시인은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라는 나의 명제의 이행이 여기 있다. 시도 시인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여러분도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그것을…….”


김수영은 시의 본질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세계와 대지의 양극의 긴장” 위에 서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내용과 표현은 적당히 반반씩 나누어 조합하는 것이 아니라고 덧붙인다. 시에서 형식과 내용, 노래와 산문, 예술성과 현실성, 무의식과 의식은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산문이란, 세계의 개진이다. 이 말은 사랑의 유보(留保)로서의 ‘노래’의 매력만큼 매력적인 말이다. 시에 있어서의 산문의 확대작업은 ‘노래’의 유보성에 대해서는 침공(侵攻)적이고 의식적이다. 우리들은 시에 있어서의 내용과 형식의 관계를 생각할 때, 내용과 형식의 동일성을 공간적으로 상상해서, 내용이 반, 형식이 반이라는 식으로 도식화해서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노래’의 유보성, 즉 예술성이 무의식적이고 은성적(隱性的)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반이 아니다. 예술성의 편에서는 하나의 시작품은 자기의 전부이고, 산문의 편, 즉 현실성의 편에서도 하나의 작품은 자기의 전부이다.”


그에게 있어서 시의 형식은 무의식적인 사랑이고 시의 내용은 의식적인 자유이다. 사랑과 자유는 인간의 보편적 이념이라는 면에서 동의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시의 형식인 사랑은 시의 내용인 자유와 동일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의 형식이든 내용이든 모두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


여기에도 나오는 그림자는 <참여시의 정리>에서처럼 의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여기의 그림자는 의식적 자유가 추구하는 세계의 개진이 아니라, 당시 참여시가 내세운 협소한 행동주의를 의미한다.


시가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은 시의 내용인 의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주의나 참여의식에서 벗어나 세계의 개진을 위한 자유의 이행을 시의 내용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요컨대 김수영이 말하는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 온몸으로 온몸을 밀고 가는 시론은 무의식적인 사랑과 의식적인 자유를 모두 이행하는 것이 된다.


그가 시인은 시를 쓰듯이 시를 논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시를 쓰는 형식인 무의식적 사랑과 시를 논하는 내용인 의식적 자유를 함께 이행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김수영의 온몸의 시론은 의식을 배제한 무의식의 시론이 아니고, 이념을 배제한 참여의식만을 강조하는 참여시도 아니다.


김수영은 무의식과 의식, 사랑과 자유, 이념과 참여의식 등을 모두 긍정하면서 양극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추구했던 다원주의자이다.



작가의 이전글 니체 : 긍지의 날, 폭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