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자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

by 이건주
이건주의 박사논문 「김수영의 시에 나타난 다원적 세계시민주의 연구」(2025)를 알기 쉽게 수정 보완한 [K-문학:다원적 세계시민 김수영]의 일부입니다. 출간 예정인 신간 도서의 초고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김수영은 후기인 1960년대 시에서도 세계시민주의 논의 가운데 하나인 개별적 민족과 보편적 세계 사이의 긴장과 충돌을 사회적 차원의 핵심 문제로 제기하였다. 그는 한편으로 민중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보편적 세계 문명을 추구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민족의 통일과 완전한 독립을 위해 개별적 민족 전통을 추구하려는 의지도 지속적으로 드러냈던 것이다.


「거대한 뿌리」(1964)에서도 개별적 민족 전통을 추구하려는 의지를 찾아볼 수 있다. 화자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고 하면서, 술자리에서도 “남쪽식”으로 앉았다가 “이북 친구”들과 만날 때는 “앉음새”를 고친다고 말한다.


그리고 “김병욱”이라는 시인이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强者)”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하였다고 소개한다. “앉는 법” 하나에도 이북식, 남쪽식, 일본식 등으로 전통과 역사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영국의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고 밝히면서,『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 나오는 조선시대의 “극적인 서울” 풍경과 “기이한 관습”을 인용한다. 그리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며, “시구문의 진창”이나 “개울”처럼 더럽고 “우울한 시대”마저 오히려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또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고 오히려 황송하다고 하면서,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고 거듭 강조한다.


이렇게 그가 “더러운” 전통과 역사마저 찬양하는 이유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과 “사랑”이 “영원”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인간과 사랑의 영원성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버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숍 여사”로 대표되는 서구 중심적 세계시민주의를 반대하면서 아무리 더럽더라도 개별적 민족 전통과 역사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는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고,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라고 비난하면서, “은밀”, “심오”, “학구”, “체면”, “인습”도 “치안국”으로 가라고 외친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부정하는 서양의 근대적 이념이나 통일 논의, 학문 등은 모두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파스칼 카자노바는 “구어의 문학화”, “외설 또는 조잡성의 언어적 특색을 원용하는 행위”는 “민족적 요구의 특수한 형태”로서 “문학적이고 언어적인 품위, 정치와 언어 그리고 문학에 대한 지배를 통해 강요된 불가분하게 문법적이고 의미론적이고 통사론적이고 사회적 교정의 기존 코드를 문제시하고 정치적이고 동시에 사회적이고 문학적인 격렬한 단절”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드러나듯이 김수영도 “구어의 문학화”, “외설 또는 조잡성의 언어적 특색을 원용하는 행위” 등을 통해 민족문학을 추구하고 실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등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부정하는 세력들을 비판하면서,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등 “무수한 반동”이 더 좋다고 말한다. 민족의 역사와 전통은 보편적 세계 문명에 역행하는 “반동”이지만, 인간과 사랑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므로 좋다는 말이다.


그리고 “제3인도교”의 “철근 기둥”으로 상징되는 보편적 세계 문명은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상징하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민족의 역사와 전통은 “맘모스” 같은 힘을 가졌기 때문에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거대한 뿌리”로 상징되는 개별적 민족 전통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다고 그가 세계시민주의를 배제하는 편협한 민족주의를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김병욱” 시인을 통해 “일본”을, “버드 비숍” 여사를 통해 “영국”이라는 세계적 관점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더러운 전통”이 좋아지고, “우울한 시대”가 “파라다이스”처럼 생각되고,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고 황송하다고 재인식하게 된 계기는 “일본”, “영국” 등 세계적 관점에서 대한민국을 바라보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특히 “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 즉 “비숍 여사”로 대표되는 세계적 관점에서 보게 되자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던 민족의 역사와 전통이 긍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비숍 여사”로 대표되는 서구 중심적 세계시민주의를 비판하면서, 「더러운 향로」(1954)와 마찬가지로 개별적 민족 전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민족의 역사와 전통이 개별 국가적 차원에서는 더럽고 썩어빠진 것일지라도, 세계시민주의적 차원에서는 반드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 문학박사 이건주


「거대한 뿌리」(1964)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 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8·15 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 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 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强者)다


나는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 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관리들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번도 장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寅煥)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 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 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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