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주의 박사논문 「김수영의 시에 나타난 다원적 세계시민주의 연구」(2025)를 알기 쉽게 수정 보완한 [K-문학:다원적 세계시민 김수영]의 일부입니다. 출간 예정인 신간 도서의 초고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김수영은 1950년대 시에서부터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적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을 제시했다. 그는 대립적 양극을 고차원적으로 종합하는 변증법이 아니라, 양극 사이에서 중용적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을 상징적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먼저, 「토끼」(1950)에서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이 나타난다. 화자는 “토끼는 입으로 새끼를 뱉으다”라는 난해한 말을 던진다. 그리고 토끼가 태어날 때부터 “뛰는 훈련”을 받는 “운명”에 처해 있다고 하면서, “어미의 입”에서 “탄생”과 동시에 “추락”을 “선고받는” 존재라고 덧붙인다.
이것은 “시인의 입에서 탄생한 말”인 “시(詩)의 타락”이 아니라, 음식을 먹는 기관인 “입”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먹고살기 위해 힘들게 뛰어다녀야 하는 것이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의 운명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사르트르가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라고 말했듯이 인간은 먹고살기 위해 뛰어다니도록 선고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태백”이 놀던 “달” 속에서 방아를 찧는 것도 “재미있는 현상”이지만, “입”에서 탄생한 것이 토끼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연이 몇 사람의 독특한 “벗”들과 함께 “이덕(異德)”을 주고 갔다고 하면서, “우리 집 뜰앞”에서 하얀 털을 비비며 “달빛”에 서서 있는 토끼에게 “너”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너의 새끼를” 보여 달라고 주문한다.
사르트르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고 말했듯이 물질문명 시대에는 “입”으로 먹어야 살 수 있는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는 것이 “이태백이 놀던 달”로 상징되는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독특한 벗”은 산문 「나와 가극단 여배우와의 사랑」(1954)에서 쓰고 있듯이 해방 직후에 “시는 조선은행 금고 속에 있는 거야! 우리는 우리의 이상을 살리기 위하여 최소한도의 돈이 필요해!”(3판:65)라고 외쳤던 초현실주의 화가 P(박일영)를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된다. 이제는 보편적 정신만 추구하지 않고, 자식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재조(才操)”, 즉 생활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자연이 부여해 준 또 하나의 “덕(德)”을 실천하겠다는 것이다.
제2부에서는 이와 정반대로 토끼가 살기 위해서는 “전쟁”이나 혹은 “나의 진실성” 모양으로 멈춰 “서서”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영혼을 가진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돈을 벌기 위해 뛰어다니다가도 “잠시” 멈춰 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토끼=인간”은 “캥거루”의 일족처럼 잘 뛰어다니지 못하고, “수우(水牛)”나 “생어(生漁)”처럼 넓은 바다에서 “음정을 맞추며 사는 법”을 습득하지 못하였으므로 뛰지만 말고 “고개”를 들고 멈춰 “서서” 주변 상황을 자주 살펴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는 특히 “몽매”와 “연령”으로 인해 개별적 생활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계하면서, “잠시” 멈춰 서서 우주적인 “별”과 자연적인 “초부”의 일하는 소리, “바람”이 생기는 곳, “새”와 “갈대”의 소리 등으로 구체화되는 “또 하나의 것”, “보이지 않는 곡선” 같은 보편적 정신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올해 “겨울”은 “눈”이 적어서 토끼가 “은거”할 곳이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도 “하아얀 것”을 보고 “불”,“산화(山火)”라고 외치면서 시를 마무리한다. 올해 겨울은 가난히 극심하지만 그래도 잠시 멈춰 서서 보편적 정신을 뜨겁게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제1부에서 토끼는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뛰어다녀야 하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인 반면에, 제2부에서 토끼는 진실성 있게 살기 위해서는 잠시 멈춰 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해야 하는 존재이다. 결국 토끼=인간은 “시적 주체가 만들어낸 환영적 산물”이나, “제국주의 시대의 몰락과 불확실한 냉전질서의 등장이라는 역사적 전망의 이중적 부재 상황”에서 “실존적 자아, 단독자의 표상”이 아니라, 가장으로서의 개별적 생활과 세계시민으로서의 보편적 정신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 문학박사 이건주
「토끼」(1950)
1
토끼는 입으로 새끼를 뱉으다
토끼는 태어날 때부터
뛰는 훈련을 받는 그러한 운명에 있었다
그는 어미의 입에서 탄생과 동시에 추락을 선고받는 것이다
토끼는 앞발이 길고
귀가 크고
눈이 붉고
또는 ‘이태백이 놀던 달 속에서 방아를 찧고’……
모두 재미있는 현상이지만
그가 입에서 탄생되었다는 것은 또 한번 토끼를 생각하게 한다
자연은 나의 몇 사람의 독특한 벗들과 함께
토끼의 탄생의 방식에 대하여
하나의 이덕(異德)을 주고 갔다
우리집 뜰 앞 토끼는 지금 하얀 털을 비비며 달빛에 서서 있다
토끼야
봄 달 속에서 나에게만 너의 재조(才操)를 보여라
너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너의 새끼를
2
생후의 토끼가 살기 위하여서는
전쟁이나 혹은 나의 진실성 모양으로 서서 있어야 하였다
누가 서 있는 게 아니라
토끼가 서서 있어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캥거루의 일족은 아니다
수우(水牛)나 생어(生漁)같이
음정을 맞추어 우는 법도
습득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고개를 들고 서서 있어야 하였다
몽매와 연령이 언제 그에게
나타날는지 모르는 까닭에
잠시 그는 별과 또 하나의 것을 쳐다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것이란 우리의 육안에는 보이지 않는 곡선 같은 것일까
초부(樵夫)의 일하는 소리
바람이 생기는 곳으로
흘러가는 흘러가는 새 소리
갈대 소리
‘올 겨울은 눈이 적어서 토끼가 은거할 곳이 없겠네’
‘저기 저 하-얀 것이 무엇입니까’
‘불이다 산화(山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