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주의 박사논문 「김수영의 시에 나타난 다원적 세계시민주의 연구」(2025)를 알기 쉽게 수정 보완한 [K-문학:다원적 세계시민 김수영]의 일부입니다. 출간 예정인 신간 도서의 초고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김수영은 1960년대 시에도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적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을 지속적으로 제시했다. 그는 대립적 양극을 고차원적으로 종합하는 변증법이 아니라, 양극 사이에서 중용적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을 일관성 있게 제시했던 것이다.
먼저, 「반달」(1963)에서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이 나타난다. 화자는 “음악”을 들으면서 쉬다 보면 “차밭”의 앞뒤 일하는 “시간”이 “가시”처럼 고통스럽게 생각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차잎”이 “아침”이면 날개를 펴고, “저녁”이면 일제히 쉰다고 하면서, 쉬는 데에도 “규율(規律)”과 “탄력(彈力)”이 있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차밭은 음악을 들으면서 쉬는 정신(차=음악)과 그 “앞뒤”의 생활(밭)이 공존하는 다원적 공간이고, “차잎”은 “생장과 쉼을 거듭하며 규율과 탄력을 잃지 않”는 존재로서, 노동의 시간인 “아침”에는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일하다가, 휴식의 시간인 “저녁”에는 “규율”, “탄력” 있게 쉬면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다원적 인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구월 중순”이 되어 차나무가 거의 자기 키만큼이나 자랐는데 “밭 주인”이 아직도 잘라가지 않는다고 하면서, 휴식의 계절인 가을이 되었으니 그만 쉬면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해야 하는데 여전히 일해야 하는 자신의 생활난을 한탄한다.
그는 차밭 옆에 “인습적(因襲的)”인 “분가루”를 칠한 “채소밭”이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채소밭은 다원적 공간인 차밭과 달리 “인습적”이고, “개똥”처럼 더러운 생활의 공간을 상징한다. 그가 채소밭의 주인이 “차밭 주인”의 “소작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채소밭”으로 상징되는 생활은 “차밭”으로 상징되는 다원적 삶에서 잠시 빌려온 것일 뿐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자신은 개별적 생활과 보편적 정신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는데, 지금은 가족의 생활난이 심해져서 잠시 채소밭을 빌려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편네”는 채소밭을 “자기 밭”이라고 멀쩡한 “거짓말”을 하면서 생활에 집착한다. 물론 그도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거짓말이 “필요할 때”가 있다고 인정한다. 그래서 이런 거짓말을 해도 생활이 나아지거나 하는 “성과”가 없다고 하면서도 여편네의 거짓말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시의 후반부에서는 “음악”을 들으면서 쉬다 보면 차밭의 앞뒤 일하는 시간이 “가시”처럼 생각된다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차밭으로 상징되는 다원적 삶이 “세계(世界)”를 배경으로 한 자신의 “사상”이고, “인생”의 “윤곽과 비밀”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모든 “음악”은 “무용곡”이고, 음악이 “폐허” 같은 생활에 “질서”를 부여하며, 돈을 벌기 위해서 감수해야 하는 “수치”를 이길 수 있게 해준다고 매우 긍정한다. 또한 “가시의 의미” 즉, 개별적 생활을 위해 일하는 고통은 음악을 들으면서 쉬는 “휴식의 휴식” 시간에 “차나무 냄새”, “어둠”, “소녀” 등으로 상징되는 보편적 정신을 추구해야 치유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마지막 연에서 그는 모든 곡(曲)이 “눈물”이라고 하면서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애쓰다 흘리는 “눈물”을 긍정한다. 그리고 “아들놈”의 눈 아래에 생긴 눈물방울 같은 “사마귀””를 빼지 않을 작정이라고 말한다. “눈물”은 “나의 장사”이므로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일하는 설움과 눈물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달아난 음악”, “반달”을 부르면서 보편적 정신을 상징하는 “음악”이 달아나서 눈물만 남은 개별적 생활도 달의 반쪽처럼 긍정하겠다고 밝힌다. 세계시민으로서 “무용곡”으로 상징되는 보편적 정신이라는 반달과 가장으로서 “눈물”로 상징되는 개별적 생활이라는 반달을 모두 긍정하고 그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달은 “시인의 에너지원이자 감각의 안테나 구실을 하는” “눈물과 음악의 이종 결합”으로서 개별적 생활의 ‘반달’과 보편적 정신의 ‘반달’을 모두 긍정하면서 중용적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 문학박사 이건주
「반달」(1963)
음악을 들으면 차밭의 앞뒤 시간이
가시처럼 생각된다
나비날개처럼 된 차잎은 아침이면
날개를 펴고 저녁이면 체조라도 하듯이
일제히 쉰다 쉬는 데에도 규율이 있고
탄력이 있다 9월 중순 차나무는 거의
내 키만큼 자라나고 노란 꽃도 이제는
보잘것없이 되었는데도 밭주인은
아직도 나타나 잘라가지 않는다
두 뙈기의 차밭 옆에는 역시 두 뙈기의
채소밭이 있다 김장 무나 배추를 심었을
인습적인 분가루를 칠한 밭 위에
나는 걸핏하면 개똥을 갖다 파묻는다
밭주인이 보면 질색을 할 노릇이지만
이 밭주인은 차밭 주인의 소작인이다
그러나 우리집 여편네는 이것을 모두
자기 밭이라고 한다 멀쩡한 거짓말이다
그러나 이런 거짓말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런 거짓말을 해도 별로
성과는 없었다 성과가 없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여편네의
거짓말에 반대하지 않는다
음악을 들으면 차밭의 앞뒤 시간이
가시처럼 생각된다 그리고 그 가시가
점점 더 똑똑해진다 동산에 걸린
새 달에 비친 나뭇가지처럼
세계를 배경으로 한 나의 사상처럼
죄어든 인생의 윤곽과 비밀처럼……
곡은 무용곡 - 모든 음악은 무용곡이다
오오 폐허의 질서여 수치의 凱歌여
차나무 냄새여 어둠이여 소녀여
휴식의 휴식이여
분명해진 그 가시의 의미여
모든 곡은 눈물이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나의 얼굴의 사마귀를 떼주었다
입밑의 사마귀와 눈밑의 사마귀……
그런 사마귀가 나의 아들놈의 눈 아래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도 꼭 빼주어야
하겠다고 결심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내 눈 아래에 다시 생긴 사마귀는
구태여 빼지 않을 작정이었다
「눈물은 나의 장사이니까」- 오오 눈물의
눈물이여 음악의 음악이여
달아난 음악이여 반달이여
내 눈 아래에 다시 생긴 사마귀는
구태여 빼지 않을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