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주의 박사논문 「김수영의 시에 나타난 다원적 세계시민주의 연구」(2025)를 알기 쉽게 수정 보완한 [K-문학:다원적 세계시민 김수영]의 일부입니다. 출간 예정인 신간 도서의 초고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김수영은 1960년대 시에도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적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을 지속적으로 제시했다. 그는 대립적 양극을 고차원적으로 종합하는 변증법이 아니라, 양극 사이에서 중용적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을 일관성 있게 제시했던 것이다.
「현대식 교량」(1964)에서도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을 찾아볼 수 있다. 화자는 현대 물질문명을 상징하는 “현대식 교량”을 건널 때마다 갑자기 “회고주의자”가 된다고 하면서, “식민지”의 “곤충들”은 이것이 얼마나 “죄”가 많은 다리인 줄도 모르고 “자기”의 다리처럼 건너다닌다고 비판한다.
또한 “나이 어린” 사람들이 어째서 이 다리가 “부자연스러운지”를 모른다고 한탄하면서, 자기는 이 다리를 건널 때마다 “심장”을 “기계”처럼 중지시키는 연습을 무수히 해왔다고 밝힌다. 젊은 세대들은 식민지 시대를 겪어보지 못해서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현대식 교량의 부자연스러움을 모르지만, 자신은 다리를 건널 때마다 울분을 참기 위해 무수히 연습해 왔다는 것이다.
그는 현대식 교량에 대한 자신의 “반항”보다 젊은이들의 자신에 대한 “사랑”, “신용”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바꾼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선생님 이야기는 20년 전 이야기이지요”라고 말할 때마다 “새로운 여유”와 “새로운 역사”를 느끼면서 이제는 개별적 민족 전통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미래 젊은 세대에게 생활의 여유를 선사해 주는 보편적 세계 문명을 새로운 역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 식민지 시대에 머물러서 보편적 세계 문명을 부정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반항임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런 해석은 그의 산문「대중의 시와 국민가요」(1964)에서 “남북통일과 현대 공업화의 비전”(3판:367)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뒷받침된다. 그는 당시에 “남북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 못지않게 민중의 생활난 해결을 위한 “현대 공업화”를 시대적 과제로 제시했던 것이다.
그는 이런 “경이(驚異)”가 자신을 늙게 하는 동시에 젊게 한다고 하면서, 현대식 교량을 둘러싸고 “엇갈리는” “늙음”과 “젊음” 사이의 갈등은 사실 누가 맞는지 “분간이 서지 않는” 것이므로 서로 간에 화해의 “다리”를 놓고 “정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개별적 민족 전통을 추구하는 “늙음”의 “속력”과 보편적 세계 문명을 추구하는 “젊음”의 “속력”을 잘 “정돈”하여 중용적 균형을 추구해야 세대 간의 “사랑”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현대식 교량은 개별적 민족과 보편적 세계 사이에서 중용적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적”을 “형제”로 만드는 “희한한 일”을 똑똑하게 보았다고 외치면서 시를 마무리한다. 미래 젊은 세대를 위해 현대식 교량으로 대표되는 물질문명의 가치를 긍정함으로써 식민지 시대 민족의 “적”들도 보편적 세계 문명의 발전을 위해 함께 협력하는 “형제”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현대식 교량은 실제의 다리인 “염천교”인 동시에 당시 사회정치적으로 논란이 매우 컸었던 한일협정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 시에 “회고”, “죄”, “식민지”, “적” 등이 직접 언급되어 있고, 한일협정이 체결된 1965년 6월 22일 직후인 7월《현대문학》에 게재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적을 형제로 만드는 실증”은 식민지 시대의 적인 일본과 수교하여 형제가 되는 한일협정을 쉽게 떠오르게 한다.
그가 희한한 일이라고 말한 이유도 “적을 이기려면 적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역설적 사랑”이 아니라, 한일협정이 적대적인 국가 간에 체결되는 조약으로서 적을 형제로 만드는 실증이기 때문에 좀처럼 일어나기 어려운 희한한 일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개별적 민족 전통만 주장하면서 한일협정에 반대할 것이 아니라, 미래 젊은 세대를 위해 한일협정을 체결하여 보편적 세계 문명의 발전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 문학박사 이건주
「현대식 교량」(1964)
현대식 교량을 건널 때마다 나는 갑자기 회고주의자가 된다
이것이 얼마나 죄가 많은 다리인 줄 모르고
식민지의 곤충들이 이십사시간을
자기의 다리처럼 건너다닌다
나이어린 사람들은 어째서 이 다리가 부자연스러운지를 모른다
그러니까 이 다리를 건너갈 때마다
나는 나의 심장을 기계처럼 중지시킨다
(이런 연습을 나는 무수히 해왔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반항에 있지 않다
저 젊은이들의 나에 대한 사랑에 있다
아니 신용이라고 해도 된다
“선생님 이야기는 이십 년 전 이야기이지요”
할 때마다 나는 그들의 나이를 찬찬히
소급해가면서 새로운 여유를 느낀다
새로운 역사라고 해도 좋다
이런 경이는 나를 늙게 하는 동시에 젊게 한다
아니 늙게 하지도 젊게 하지도 않는다
이 다리 밑에서 엇갈리는 기차처럼
늙음과 젊음의 분간이 서지 않는다
다리는 이러한 정지의 증인이다
젊음과 늙음이 엇갈리는 순간
그러한 속력과 속력의 정돈 속에서
다리는 사랑을 배운다
정말 희한한 일이다
나는 이제 적을 형제로 만드는 실증(實證)을
똑똑하게 천천히 보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