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건주 Feb 09. 2021

김수영과 다원주의 : 먼지

김수영과 다원주의 : 먼지


김수영은 <반시론>에서 “마구 먼지를 퍼붓는” 무서울 정도로 열성적인 종로 거리의 청소부들 얘기로 <먼지>의 시작 노트를 펼쳐 놓는다. 그는 행인들을 무시하는 청소부들의 태도를 평소의 원한과 고질화된 시기심까지도 한데 섞여서 폭발하는 “합법적인 복수 행위”로 규정하고, 이를 예사로 생각하면서 불쾌한 얼굴을 지을 만한 여유도 없이 살아가는 행인들의 무표정한 얼굴에 주목한다. 그리고 청소부의 복수 행위와 행인들의 무표정한 얼굴의 밑바닥까지 꿰뚫어 보려면 “거지가 돼야 한다.”라고 외친다.


그가 먼지에 싸인 도시를 벗어나 속물적인 욕망을 극복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제시하는 것이 도봉산 아래의 “농장”이다. 그는 농장을 “자연으로의 문을 열어주는 유일한 성당(聖堂)”이라고 하면서, “흙은 모든 나의 마음의 때를 씻겨준다. 흙에 비하면 나의 문학까지도 범죄에 속한다.”라고 예찬한다. 속물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원한”과 “복수행위”만 일삼고 있는 현대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거지-되기’와 ‘농부-되기’를 통해 초월적인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지>에서도 초월적인 정신을 회복하려는 시적 화자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인간이 한편으로는 “머리”와 “팔”, 즉 육체적 욕망으로 인해 “현재”의 부정적인 “먼지”와 “그늘”에 싸여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혼도 가지고 있으므로 초월적 정신을 상징하는 “구름”과 “산(山)”에도 싸여 있는 이중적 존재라고 본다. 육체와 영혼을 모두 가진 존재로서 인간은 <반시론>에서처럼 종로 새벽 거리에서 먼지에 싸여 있는 욕망의 존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도봉산 밑의 돈사(豚舍) 옆의 날카롭게 닳은 부삽날”로 상징되는 농장에서 성스럽게 살아갈 수도 있는 정신적 존재이기도 하다.


이렇게 <반시론>과 연결해서 보면, 이 시의 대립 구도는 “가능성, 현존성, 필연성의 영역인 갱 안의 세계와 불가능성, 비현존성, 우연성을 특질로 하는 ‘먼지’의 세계”21)의 대립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갱 안에서 벌어지는 현실적인 ‘육체=먼지’와 초월적인 ‘영혼=산(농장)’의 긴장으로 볼 수도 있다. 인간이라는 “갱(坑)”, “참호(塹壕)” 안에는 “돌”, “쇠”, “구리”, “넝마” 등으로 상징되는 삭막하고 더러운 현실적 육체와 “불”과 “별” 그리고 “영원의 행동”을 추구하는 초월적 영혼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현대인들이 “참호의 입구의 ㄱ자”, 즉 인간존재의 입구인 먹고사는 문제에 사로잡혀 인간적인 “얼굴”이나 “목소리”를 무시하고 “복수”를 하듯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복수행위가 결국 갱이나 참호, 즉 인간존재를 무너뜨리는 “위태로운 일”이라고 신호를 보내도 듣지 못하고 이기적으로 자신들의 “몸”만 키우고 있는 속물적인 세인(世人)들을 비판한다. 그리고 서로 “네가 씹는 음식”에 “증오(憎惡)”하지 않고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면서 “죽은 행동”만 계속하면서 사는 것은 진정 살아 있는 인간의 표시(表示)가 아니라고 비판한다.


그래도 그는 하나의 행동이 열의 행동을 부르면서 “죽은 행동”이 계속되고, 서로 치고 막고 싸우면서 “마지막 윤리(倫理)”를 넘어서는 비윤리의 시대, 무표정한 얼굴의 “침묵(沈默)”과 합법적인 복수행위를 일삼는 “발악(發惡)”이 지배하는 오늘에도 “갱 안의 잉크 수건의 칼자국”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현대가 육체적인 욕망이 지배하는 비윤리적인 시대이지만, 여전히 ‘갱=인간’ 안에는 “잉크 수건의 칼자국”처럼 육체와 영혼이 선명하게 구분되어 있으므로 인간이 속물적인 욕망에서 벗어나 초월적 정신을 추구할 수 있다는 희망의 표현으로 이해된다.


이어서 그가 속물적 욕망을 둘러싼 “증오”가 가고 초월적 정신을 추구하는 “이슬”이 번쩍이며, 아름다운 “음악”이 오고, 인간의 “발자국소리”가 가슴을 펴고 웃는 “변화”의 시작이 올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는 것도 바로 인간이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육체와 영혼을 모두 가진 인간의 이중성으로 인해 “돈”이 “사랑”이 되고 다시 사랑이 돈이 될 수 있으며, 개인적인 “갱(坑)의 단층(斷層)”의 길이나 “돈의 꿈”도 길어졌다가 짧아졌다가 변하게 마련이라고 인식한다. 인간은 현실적인 돈과 초월적인 사랑 사이에서 긴장하면서 균형을 찾아가는 곡예사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결국 현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거지-되기’와 ‘농부-되기’를 통해 초월적인 정신을 회복하려는 존재론적 노력이 중요하다. 그래서 그는 도시의 먼지 속에서 ‘돈의 꿈’에만 사로잡혀서 타락(墮落)해 버린 자신을 반성하면서, “죽은 행동”만 계속하고, 연명하기 위해 “전화”(<전화 이야기>)만 끝없이 울리고 있는 자신의 속물적인 욕망을 극복하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마지막 행에서 “겨우 망각(忘却)을 실현한 나를 발견한다”라고 하면서, 욕망을 극복하고 망각하기 위한 주체적인 ‘거지-되기’와 ‘농부-되기’가 겨우 성공했음을 선언한다. 그는 여기에서 먼지 같은 육체적 욕망을 극복하는 힘을 인간의 초월적인 영혼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그는 <먼지>에서 육체와 영혼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초월적인 정신을 보다 강조하는 시(詩)를 제시하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가 산문 <삼동(三冬) 유감>에서 비슷한 시기에 탈고된 <라디오계>와 <먼지>가 “유물론과 유심론만한 대척적인 차이”가 있다고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현실적인 생활을 강조하는 ‘반시’를 제시했던 <라디오계>와 반대로 이 시에서는 초월적인 정신을 강조하는 ‘시’를 제시하면서 양극의 긴장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


먼지(1967)


네 머리는 네 팔은 네 현재는 / 먼지에 싸여 있다 구름에 싸여 있고 / 그늘에 싸여 있고 산에 싸여 있고 / 구멍에 싸여 있고


돌에 쇠에 구리에 넝마에 삭아 / 삭은 그늘에 또 삭아 부스러져 / 거미줄이 쳐지고 망각이 들어앉고 / 들어앉다 튀어나오고 / 불이 튕기고 별이 튕기고 영원의 / 행동이 튕기고 자고 깨고 / 죽고 하지만 모두가 갱 안에서 / 참호 안에서 일어나는 일


사람의 얼굴도 무섭지 않고 / 그의 목소리도 방해가 안 되고 / 어제의 행동과 내일의 복수가 상쇄되고 / 참호의 입구의 ㄱ자가 문제되고


내일의 행동이 먼지를 쓰고 있다 / 위태로운 일이라고 낙반(落盤)의 신호를 / 올릴 수도 없고 찻잔에 부딪치는 / 차숟가락만한 쇳소리도 안 들리고


타면(惰眠)의 축적으로 우리 몸은 자라고 / 그래도 행동이 마지막 의미를 갖고 / 네가 씹는 음식에 내가 증오하지 않음이 / 내가 겨우 살아 있는 표시라


하나의 행동이 열의 행동을 부르고 / 미리 막을 줄 알고 미리 막아져 있고 / 미리 칠 줄 알고 미리 쳐들어가 있고 / 조우(遭遇)의 마지막 윤리를 넘어서


어제와 오늘이 하늘과 땅처럼 / 달라지고 침묵과 발악이 오늘과 / 내일처럼 달라지고 달라지지 않는 / 이 갱 안의 잉크 수건의 칼자죽


증오가 가고 이슬이 번쩍이고 / 음악이 오고 변화의 시작이 오고 / 변화의 끝이 가고 땅 위를 걷고 있는 / 발자국 소리가 가슴을 펴고 웃고 / 희화(戱畵)의 계시가 돈이 되고 / 돈이 되고 사랑이 되고 갱의 단층의 길이가 / 얇아지고 돈이 돈이 되고 돈이 / 길어지고 짧아지고


돈의 꿈이 길어지고 짧아지고 타락의 / 길이도 표준이 없어지고 먼지가 다시 생기고 / 갱이 생기고 그늘이 생기고 돌이 쇠가 / 구리가 먼지가 생기고 / 죽은 행동이 계속된다 너와 내가 계속되고 / 전화가 울리고 놀라고 놀래고 / 끝이 없어지고 끝이 생기고 겨우 / 망각을 실현한 나를 발견한다


* 이건주, <김수영의 다원주의 시론 연구 - <반시론>에 나타난 긴장을 중심으로>, 《현대문학의 연구》 제73호, 한국문학연구학회, 2021, 7-39쪽.





작가의 이전글 김수영과 다원주의 : 미인(美人)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