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꿀은 것은 죄가 아니다.
90년대에 미국 유학을 갔었다면. 주변 사람은 지금도 우리 집이 부잣집인 줄 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먼 추억이 되었을 뿐. 나에게는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히려 익숙하고 마음에 와 닿는다.
어머니는 분식집을 하셨다. 어묵도 팔고. 떡볶이도 파는 가게를 수유리 장미원 시장에 여신 것이다.
어머니께서 분식집을 하셨다고?
아내 역시 현재 우리 어머니를 보더라도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어머니는 힘든 상황에서도 마음만은 굳건히 하셨기 때문에 지금 보더라도 힘든 형편의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수 십 년 전의 어머니만큼이나 온화한 느낌이 아우라로 감싼다.
응 떡볶이뿐만 아니라.
나중엔 칼국수, 샤부샤부 음식점도 하셨어.
아들 셋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노력한 부모님의 희생. 이것은 아마 우리 세대가 본받아야 할 점인 것 같다. 그러나 우리 세대가 이처럼 희생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단지 생계를 위해서 이전에 하던 일이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어머니께서는 대형 건축회사 사모님이 아닌 분식집 주인이 되셨다.
98년. 태어나서 처음 보는 동네로 이사 왔다.
수유리라는 곳. 지금 가보더라도 인정이 많은 동네다. 송파의 올림픽 아파트라는 곳은 널직 널찍한 인도가 있는 반면. 수유리에는 골 복길이 구비 구비 연결되어 있다. 그 차이를 어릴 때. 경험하지 못하다가 중학생이 되어서 경험할 수 있었다.
사람은 경험하는 만큼 알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부모님이 만들어준 환경으로 인해서 골목길이 있는 마을을 모르고 살았다. 남들이 말하는 '고생을 모르고 살아온 막내 도련님' 이 딱 맞는 말인 것 같다.
첫 한 달은 마음고생이 심했다. 바뀐 환경을 이해하기에 중학교 1학년생은 아직 어린가 보다. 51평의 아파트에서 10평대 빌라로 이사오니 집은 정말 작았다. 빌라는 앞뒤가 막혀 있어서 햇볕이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부모님은 최선을 다해 그곳에서 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셨다.
그런데 되돌이켜 보면 그때가 재밌었던 것 같아.
아니 왜? 가정 형편이 그렇게 어려워졌는데도?
응. 정말 친구들이 많아졌거든.
복학생들이 형이라고 싫어하지 않았어?
아니. 난 친구들에게 형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어.
동생들한테 형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다고?
우리나라에서는 나이 1살에 목숨을 건다. 그러나 그렇게 목숨 거는 사람들은 잘 모른다. 윗사람 노릇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차라리 그것을 포기하면 얼마나 많은 것을 얻는지. 그래서 나는 그냥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설 수 이미지로 바꾸게 된다. 또한 미국에서 경험했던 2~3살 많은 친구들처럼 행동했다.
반에 앉아 있었을 때. 내 옆에는 유호상이라는 친구가 앉아 있었다. 이 친구가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은 내가 서라벌 중학교에서 처음 사귄 친구이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너 중학교 처음이지?
솔지 한 이 인사로 인해서 나는 한 번에 전교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1년 꿀은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나를 보기 위해서 앞다퉈 반을 찾아왔다.
싸움 좀 한다는 친구.
괜히 시비를 걸러 오는 친구.
그냥 궁금해서 찾아온 친구 등.
다양한 아이들이 우리 반에 찾아와서 내 얼굴을 보고 갔다. 당시 서라벌 중학교는 새로 터전을 옮긴 학교였는데. 교복도 바뀔 예정이라 사복을 입고 다녔다. 친구들을 빠르게 사귀기 시작하니 학교생활은 정말 재밌었다. 그러나 1년을 꿀은 나에게 피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기싸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