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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평김한량 Mar 03. 2016

아동학대로 이어진 선생님의 사랑.

인생의 첫 번째 고난.

뭐? 정말 그런 일을 겪었다고?


아내는 급 흥분하기 시작했다. 내가 어릴 때 겪었던 일이 당연한 게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아내와 결혼을 했을 때. 우리는 처음 연애보다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그걸 부모님께 왜  이야기하지 않았어?


 물론 나는 부모님께 사실을  이야기했으나. 안타깝게도 그 선생님이 나의 담임이었던 1년 동안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나는 수업을 받으면서 차별을 받았고. 그 1년 동안 친구도 없이 지내야만 했다.


 이 사건은 부모님과 우리 아내만 아는 사건이다. 사회는 문제아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문제아 취급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반대로 생각해본다. 그들에게도 분명히 속사정은 있었을 것이라고. 그러니 이야기는 들어주어야 한다고.


 나를 찾아 삼만리는 초등학교 시절로 되돌아 간다.


20여 년 전..


 어머니께서는 내가 초등학교를 입학하던 당시에 암투병을 하고 계셨다. 나는 사실 그 당시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진 않는다. 형들은 아마 어머니께서 편찮으셨던 시절을 정확하게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제 8살 어린이에 불과했다.


 주변의 이야기에 따르면 어머니께서 병원에서 오랜 시간을 보낼 당시. 나는 힘이 없었다고 했다. 운동장을  터벅터벅거리면서 혼자 걸으며 돌던 것도 최근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다.  어린아이가 이해하기엔 집에 엄마가 없다 사실은 이해하기 힘들었나 보다.


아마 그땐 많은 위로가 필요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해가 바뀌고 나는 학년이 올라갔다.


신기하게도 그 선생님과의 인연은 생생하기만 하다.


잘못된 인연은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나는 학교를 좋아했다. 그래서 일등으로 달려가는 것을 좋아했고. 늘 학교까지 뜀박질로 달려갔다.


학교에 가면 좋은 이유는?


친구가 많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오늘 뭐할까 노는 것을 정하고. 그리고 넓은 운동장을 마음껏 뛰노는 것은 어린이들의 특권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들 어린 시절로 되돌아 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선생님~ 자꾸 얘가 괴롭혀요.


 어린 시절 친구들과 장난을 치던 것은 추억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나에게는 불리한 행동이 되어간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준태 앞으로 네 자리는 여기다.


 그리고  배치받은 것이 벽을 보고 있던 책상이었다. 원래 초등학교 저학년은 남녀 짝꿍으로 선생님을 바라보게 되어 있었지만. 나는 웬일인지 친구를 괴롭힌 죄로 면벽 수업을 받았다. 그 당시 나는 내가 잘못하면 당연히 벽을 보고 수업을 받아야 하는 줄 알았다.


 어린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혼자 공책에 낙서를 하며 놀았다. 그런데 학교 생활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그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선생님이 대놓고 차별을 하기 시작하면. 학생들은 자연히 그 아이와 멀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몰랐다. 그렇게 나는 친구들까지 잃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TV 프로가 있다. 그곳에서 자녀가 둘이 있을 때. 한 아이에게만 편향적인 사랑을 주었을 때. 다른 한 아이는 폭력성을 갖게 되거나 짜증을 잘 낸다는 것을 보았다. 아마 짜증을 내거나 폭력적으로 변하는 것은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나는 항상 책상 위치가 교실 문 앞 아니면, 벽이었는지 모르겠다. 정확하진 않지만, 결국 나는  하루 동안의 벌이 아닌 긴 시간 그런 자리를  배치받으면서 학교를 다닌 것 같다. 원래 짝꿍이 바뀌는 날은 한 달에 한번 정도인 것 같은데. 나는 그 기간 동안에도 달라지는 것 없이 그렇게 쓸쓸히 수업을 받았다. 그리고 선생님께  사랑받는 아이들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준태! 네가 잘못했네.


로 시작하는 야단은 결국 모든 것이 내 잘못으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그런 편파적인 태도는 내가 입만 열어도 혼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결국 나는 아이들로부터는 문제아. 지금으로 말하면 왕따가 되어갔다.


그런 날이면.. 나는 집으로 달려와 억울한 사정을 소리 지르듯  이야기하며. 소파를 때리기 시작했다. 어린이에게 선생님이라는 어른은 너무 커 보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실에 있는 소파를 실컷 두들겨 주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런데 1년이란 시간은 참 길더라.


견디다 못한 나는 부모님과 함께 학교를 방문하기로 했다. 그 당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은 우리 부모님께서 선생님께 좋은 선물을 구입해드린 것이다. 나는 교실 밖에 있었고. 우리 부모님께서는 한참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난 후에 나오셨다.


나는 그렇게 해결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교실 밖에서 듣는 서당개 수업이 시작되었다.


복도는 춥다.


수업에 조금이라도 산만하면 나는 이젠 복도로 나가게 되었다. 복도에서 40분 정도 서서 수업을 들으면 다리가 아프다. 그래서 앉아 있거나 벽에 기대면, 선생님께 혼났다. 힘들어도 참아야 하는 시간이 계속되었다. 쉬는 시간이 돼서야 나는 반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지금 문득 한 아이의 눈빛이 생각났다.


그 아이는 내가 문 앞에 앉아서 수업을 듣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게 싫어서 그 아이에게 보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결국 나는 그 아이를 쉬는 시간에 괴롭혔고  역사적인 순간이 오게 되었다.


선생님은 나를 끌고 가 가방을 챙기게 했다.


40명의 학생 앞에 나에게 가방을 메고 서있게 했다. 선생님은 몇 분간 그동안 잘못했던 것을 모두 설명했다. 죄목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는 억울해서 계속 울기만 했고, 선생님은 이제 나를 다른 학교로 전학을 보낸다고 했다.


전학..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 나는 40명과 섞일 수 없으며.

나만 사라지면 정말 이 반에는 평화가 찾아올까.

나의 모든 것이 문제일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래서 그 시간은 전학을 가지 않겠다고 울부짖는 나의 절규로 흘러갔다. 주변 아이들이 보기엔 아마 나는 문제아였고. 선생님들의 모든 조치는 모두 정당하다고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내 스스로가 잘못했기 때문에 모두  처벌받은 벌이라고 생각했지만. 주변에 이렇게 초등학교 저학년을 보낸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내로 인해서 이것들이 모두 학대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아내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어떻게 귀여운 아이한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나 역시  이야기하면서 전학을 보내겠다는 선생님과 한 시간 동안 버티던 나의 절규는 서럽기만 했다.


만약에 결혼을 해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면.
이 이야기는 그냥 가슴 깊숙이 묻혔을지도 모르겠다.


아동 학대는 아동을 신체적, 성적, 심리적으로 학대하거나 돌보지 않고 방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동 학대는 아동의 가정뿐만 아니라 아동이 속해 있는 학교나 기타 모든 기관에서 발생할 수 있다.

-심리학 용어사전에서-



나는 그 상황에서 1년을 모두 마치고 나서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처음 입학했던 모습은 아니었다. 학교는 더 이상 신나는 곳이 아니었고. 선생님을 믿을 수 없었다. 잘못한 일에는 처벌이 반드시 따랐으며. 어릴 적 학대의 기억은 20년이 지나도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어쩌면 아마도 평생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 전화 한 통이 왔다. 어머니께 걸려온 전화는 다름 아닌 나를 학대했던 선생님이었다. 어머니께서 최근에 다시 알려주신 내용은 이랬다.


예전에 그 담임 선생님께 전화가 왔단다. 그런데, 그 당시에 선생님이 아들과 관계가 좋지 않았다는구나. 선생님은 아들이 좀 더 활발하고 똘똘한 아이였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생각처럼 잘 안되고 아이에 대해 실망하고 있을 때. 네가 그 선생님을 만났다는 거야.  그런데 네 모습을 볼 때마다 아이에 대한 실망감이 커서 너를 미워하게 됐다는구나. 그래서 너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시더구나.


 정리를 해보자면. 나는 결국 내가 잘못해서 1년 내내 처벌을 받고 왕따를 당한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 아들을 교육할 때. 아들이 따라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을 나에게 터트렸다는 것이었다. 물론 고학년이 되어서 들은 전화 내용이라 이해는 가기도 했지만.. 전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게 사과 한마디로 끝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 일을 겪고 나서 내 인생은 변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임에도 힘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약자가 되면 처절하게 당할  수밖에 없고. 억울한 일을 겪더라도 아무도 내 이야기엔 귀를 기울여주지 않는다는 현실 말이다.


'나를  찾아 삼만리'가
고난으로 시작되었다.


현재. 원하던 대학에서 MBA 과정을 마치고, 이젠 결혼을 해서 한가정의 가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 아픈 기억은 쓴맛을 남기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만약 부당한 처사를 당했다면.

스스로를 용서해주세요.
그것은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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