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창업의 실패 이야기.
새로운 도전. 게임 개발.
어제 아내와 이야기했던 것은 다시 새로운 주제로 넘어갔다. 초등학교 때, 아픈 추억을 간직한 나는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았다. 살다 보면 힘든 일을 겪기도 한다. 하지만 나의 장점은 그 힘든 일로 인해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당시에 내가 관심을 갖고 있었던 만화 그리기 그리고 게임 개발을 시도하던 때였다. 아픔은 아픔대로 간직하고 있던 시기였지만.
천일야화처럼 밤마다 이어진 우리 부부의 대화는 내가 어릴 적 게임회사를 만들었던 이야기로 넘어갔다. 지금은 경영과 마케팅 그리고 IT가 결합된 일를 하고 있지만. 어릴 적 꿈은 게임회사를 만드는 것이었다.
어린아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사실 내가 왜 당시에 창업에 열중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 사업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그냥 세상을 살면서 당연히 사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듯했다. 물론 그 당시에 했던 일들은 기껏 해봐야 만원, 이만 원짜리 창업이었지만. 어린 시절의 경험은 지금도 귀하게 쓰이고 있다.
이번에는 95년으로 돌아가 본다.
시인아. 게임회사 이름은 세이벨로 하자.
이렇게 초등학생 2명의 호기심에 게임 회사는 만들어졌다. 때는 95년으로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시인이 와 나는 게임을 좋아한다는 공통의 취미로 친하게 지냈다. 게임기는 둘 다 세가 메가드라이브를 갖고 있었으며. 나중에는 3DO 얼라이브와 세가 새턴이라는 32 bit 게임기로 게임을 즐기기도 했다. 당시 CD 게임기는 획기적이었으며. 한글이 아닌 일본어로 게임을 즐기던 시기였다.
둘이 개발하는 게임은 컴퓨터 게임이었다. 당시엔 컴퓨터 게임은 디스켓과 CD로 즐기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온라인 게임들도 거의 없던 시절이다. 시인이 와 나는 미래에 게임이 발전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게임 회사를 만들기로 한다.
세이벨은 미국 자동차 이름 '세이블'을 잘못 읽어 만들어진 이름이다.
아마 지금 읽었다면, 세이블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집에서 둘은 진지하게 칠판에 태극기를 그려놓고 애국가를 불렀다. 그때 친구 두 명이 우리 집 벨을 눌렀다. 처음에는 창업식을 축하해주러 온 줄 알았지만. 게임기가 학급에 몇 대 없던 시절이라 그냥 놀러 왔던 것. 친구들에게 미안하다고 돌려보낸 후에 우리는 하던 창업식을 시작했다.
게임을 개발을 시작하다.
게임을 개발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베이식이나 기타 컴퓨터 기술을 배울 수도 있었겠지만. 학교 컴퓨터는 8비트 컴퓨터에 불과했다. 그리고 우리 집 컴퓨터에서도 개발할 수 있는 것은 너무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구입하기로 한 것은 '쯔꾸르 시리즈'이다.
도스 시절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 아마추어에게 사랑받는, 숱한 명작을 탄생시킨 게임 제작 툴. 일본의 기업 카도카와가 제작, 엔터브레인 브랜드로 발매되고 있는 게임 제작 툴 시리즈이다. 이름의 유래는 '만들다'라는 뜻의 일본어 作る(つくる)와 '툴(tool)'의 일본식 표기인 ツール 이 합성된 조어이다. 따라서 제작 툴 시리즈인 쯔꾸르는 일본어로 "ツクル"가 아닌 "ツクール"로 표기된다. 한국어로 굳이 번역하면 만툴기 정도.
-나무 위키에서-
그리고 우리는 주식을 발행하기로 한다.
친구들에게 주식을 만들어서 팔기로 했다. 문구점에 가서 8절지를 구입하고. 시인이 와 내 지장을 찍고 그 위에 세이벨로 적어서 만들었다. 그리고 내구성을 위해 비싼 돈을 들여 각각 코팅해서 만들었다. 두 사람의 지장이 찍혀 있으니 위조를 하기 힘들고. 또한 복사를 하더라도 팔 절지 두께로는 쉽지 않을 것이다. 크기 역시 휴대하기 좋도록 명함사이즈와 유사하게 제작했다. 한 개를 만드는데 약 100원가량 들어갔다.
우리는 게임회사의 발전을 위해 친구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의외의 반응이 일어났다. 500원에 팔기 시작한 주식이 한순간에 모두 다 팔린 것이다. 40장이 모두 팔렸다는 것은 우리 둘 다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다. 그것을 자본으로 삼아서 게임회사의 기틀이 될 쯔꾸르 게임 개발에 들어갔다.
이사를 간 동업자.
동업을 했었던 시인이는 나와 의형제를 맺었을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 그는 정확하면서도 창의적이었으며. 나는 저돌적인 추진력이 장점이었다. 그런데 송파지역에 살았던 그 친구는 머지않아 분당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신도시로 친구들이 이사를 떠났는데. 시인 이도 그렇게 떠나게 되었다.
나는 저돌적이었지만. 체계적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쯔꾸르 개발을 혼자 하면서 게임을 만들어 나갔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시나리오 작업이었다.
판타지 소설로 만들어졌는데 내용은 대강 이렇다. '장 최악'이라는 캐릭터는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서 마을을 떠난다. 그리고 악을 찾아 모험을 하며. 동료들을 모은다. 동료들의 캐릭터와 이름은 같은 반 친구들의 이름으로 만들었고. 반에 있었던 친구들에게도 내용의 반응은 좋았다.
그렇게 시나리오 작업을 하는데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시나리오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방대해졌고. 나는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게임 개발과 동시에 시나리오 작업이 어려우니 글을 쓰는데 열중했다.
이 최악의 용사를 위하여는 학급 문집에 실렸고. 그 내용으로 게임을 개발하기 위해 시나리오 작업을 계속했다. 하지만 어느덧 중학생이 되었다. 그것이 게임 개발에 난관이 되었다. 당시 분위기로는 중학교부터 대학을 준비하는 선행학습이 유행이었다.
멈추게 된 개발의 원동력
모두들 성문 기초 영문법을 초등학교 시절에 마스터 했다. 그리고 1년~2년 선행학습을 시작하기 때문에 상당히 높은 수준의 학습을 요구했고. 학습량도 벅찼다. 학급 내에서도 경쟁이 심했기 때문에 나는 편한 마음으로 그 프로젝트를 완수할 수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에 비해 떨어지는 작업량과 당장 눈앞에 있는 학원과 과제들로 인해서 꿈을 잠시 접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첫번째 창업은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지금까지 했으면 어땠을까?
아내는 그 일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매우 아쉬워하는 눈치다. 90년대는 물론 지금도 대학에 대한 막연한 입시는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나도 만약 20년 동안 게임 개발을 했었다면.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지 궁금하긴 했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우연히 일어나는 것은 없다. 시인이라는 친구는 지금 해외에 있다. 미국에서 과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어딘가에서 열심히 연구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반대로 나는 여러 번의 창업을 시도했고. 이제는 그 경험을 공유하며 새로운 프로젝트를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