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당연필
박희정
내 살이 다 닳아서 없어질 그때까지
시간이 문드러져 여백을 채울 때까지
뻥 뚫린 심장의 말을
전할 수만 있다면
과거 물자가 부족하던 시절 흔히 보아오던 몽당연필은 이젠 찾기 힘든 물건이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손가락에 겨우 쥘 정도로 짧아진 연필은 다 쓴 볼펜 자루에 끼워 그야말로 ‘내 살이 다 닳아서 없어질 그때까지’ 사용했고, 그러한 정신은 커가면서 각자의 육신에도 적용되었지요. 집안을 위해, 가족을 위해 뼈가 닳도록 일하는 건 당연지사였습니다.
몽당연필은 절약과 제 몸을 아끼지 않는 헌신이라는 두 가지 가치를 보여줍니다. 이어지는 중장에선 몽당연필의 의미가 또 다른 차원으로 펼쳐집니다. 문드러진 시간을 기록으로 옮기는 역할이지요. 수기에 의존하던 지난 시대엔 연필은 증인으로서의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이미 흘러간 이야기입니다. 아날로그 시대의 유산을 고수하는 사람은 일부 시인과 같이 소수일 뿐이지요. 게다가 시인은 영상으로 무장한 세력에 밀려나 변방에 처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시인이란 몽당연필과 같은 입장인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심장의 말을’ 전하기 위해 연필을 손에 쥡니다. ‘뻥 뚫린’은 타자를 향한 간절함이 담겨 있네요. 자기중심적이고 물질을 우선하며 영상을 지나치게 탐닉하는 오늘날 시인이 몽당연필이 되어 전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일까요. 꽉 막힌 심장들에 의해 외면당하고 있는 시를 이야기하는 건 아닐까요. 인류의 일원이기에 시를 읽고 쓴다는 ‘죽은 시인의 사회’ 속 대사가 뇌리를 맴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