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왕 한번 사는 거, 조금이라도 웃으면서 삽시다
"매일 그렇게 웃어주면 안 피곤 해?"
글쎄, 웃어준다라고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뿐더러 솔직히 말하면 웃는 것이 나에게 크게 어려운 적이 없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지으면 에너지가 과하게 쓰이기 마련인데,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는 건 에너지가 잘 지켜지기 때문이겠지.
서비스직이 천직인 사람들은 진상 손님이 와도 능청스레 대처하는 것처럼, 나도 웃음이 천직이라 생각해 왔다. 결정적으로, 웃어서 안 좋을 게 없다는 결론을 품고 있어서인지 더욱이 어렵지 않은 걸 수도 있다.
언제부터 그렇게 잘 웃으며 살았는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잘 웃는 모습 덕분에 상황이 좋게 흘러간 적이 많았다는 것. 가끔은 내가 가진 호감이 잘 전달되기도 하고, 딱딱한 상황이 가볍게 풀어지기도 하고, 어딜 가든 급식 이모님께 맛있는 반찬을 듬뿍 받는 일은 주머니 속 숨겨둔 나만의 자랑이다. (물론 늘 웃으며 살다 보면 오해를 사는 상황도 꽤 자주 생긴다)
그런 나에게 어린 시절 지겹도록 따라붙었던 말이 있다. '착한 척'이라는 세 글자인데, 세상에 물렀던 나는 그게 진짜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는 그저 '착한 척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늘 웃고 잘 도와주면 웬만하면 착한 척하는 거라 후하게 봐주었다.
잠시만, 그럼 진짜 '착한 것'과 '착한 척'은 뭐가 다른데?
부모님은 늘 상생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며 혼자 잘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치셨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르치셨다기보다 내가 당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혼자 배웠다. 아주 어릴 적부터 사회적 약자를 위한 뉴스를 자주 접하고, 그들을 위해 힘쓰고 행동하는 부모님을 보며 내 마음 깊숙한 곳에도 '함께'라는 씨앗이 자리를 잡았다. (인사이드아웃 2를 봤다면, 하나의 가치관이 씨앗처럼 자리 잡는 모습을 연상할 수도 있겠다)
나는 혼자보다는 친구들과 함께할 때 더 많이 웃었고, 어려운 수학 문제를 혼자 고민하는 친구에게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었을 때, 그 문제를 다시 볼 때마다 반갑고 뿌듯했다. 도움을 주니, 받을 수 있는 기회도 많았다. 친구들과 머리를 맞대며 함께 헤쳐나간 문제집 속 질문들이 셀 수 없이 많을 테다.
아날로그로 필기를 해야 했던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꽤 필기를 잘한다고 소문난 학생이었다. 친구들에게 자주 필기노트를 빌려주었는데, 어느 날은 내가 모르는 친구들까지도 내 필기노트의 복사본을 가지고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그 친구들에게 혹시 이 필기는 어디서 난 거냐 물으니, 본인들도 건너 건너 전달받아 출처는 모른단다.
당연하게도 속상했다. 친구들아, 이게 최선이었니?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내가 도움 받은 만큼 나도 도울 수 있는 게 되려 다행이지 않을까, 하는 긍정으로 그날의 일기를 마무리했던 기억이 난다.
세상은 이분법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정확하게 반으로 나눌 수도 없다.
착한 사람이 호구란 법도 없고, 나쁜 사람이라고 모두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란 법도 없다.
착한 것과 나쁜 것, 어느 쪽이 좋은가? 결론을 내기 전에, 나는 그저 '좋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런 내 모습이 좋고, 그게 하루하루 밝게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니까. '-척'도 10년을 하면 그 사람이라고 했다.
나를 이 세상에 어떤 모습으로 살게 하고 싶은지, 시간이 많이 흘러 내가 사회 내 '어른'의 역할을 해야 할 때 어떤 어른이고 싶은지를 생각해 보자. 나는 이 세상을 새로이 살아갈 많은 사람들이 조금 더 좋은 세상에 살았으면 좋겠다고 부지런히 생각한다. 그래서 좋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나 또한 가끔 있는 좋은 어른들 덕분에 수많은 갈래에서 나의 길을 꿋꿋하게 찾을 수 있었으니까.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주변의 상황과 사람도 달라지고, 내가 유지하려는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그래서 지금은 종종 들려오는 '착한 척'이라는 소리가 반갑기도 하다. 선함의 가치를 내려치기 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래서 본인들은 나쁘게 살아가고 있나 싶은 생각이 스친다. 그러다가도 저 사람의 머릿속이 궁금하다. 좋고 나쁨의 기준이 사람마다 편차가 큰 걸까?
나는 함께 일 때 더욱 행복한 사람이다. (사실 누구나 그렇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어떤 사람과 함께하느냐는 행복을 결정하는데 굉장히 중요하다. 함께 할 때 행복할 수 있는 사람. 내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오래오래 건강히 "함께" 할 수 있는 나만의 방식과 원칙을 세우고 지켜나갈 예정이다. 그리고 그 여정을 많은 사람과 함께 할 것.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우리' 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