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이라 다행이다.
'식물이라 다행이다.'
새벽녘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어느 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방을 채우고 있는 것들이 식물이라 참 다행이라고.
철저한 내향인. 무신경한 성격. 딱딱한 말투. 그 때문일까. 어릴 적부터 유독 사람을 대하는 것이 어려웠다.
나에게 사람을 대하는 일이란 고도의 두뇌싸움이자 문명사회에 속하기 위한 치열한 생존 싸움이었다.
짧은 순간 상대가 던진 말에 어울릴 만한 대답을 찾고,
그 대답이 너무 성의 없거나 과하진 않은지 머릿속으로 수위를 검토하고, 그렇게 골라낸 말들을 다시 보기 좋게 엮어 입 밖으로 내는 일련의 과정.
마치 게임오버 직전의 테트리스 같았다.
어떤 블록을 어디에 맞춰 넣어야 하는지, 적당한 자리를 찾는 것만도 버거운데 쌓인 블록은 계속 차오르고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간신히 한 줄을 없애고 나니 또 다른 블록이 내려오기 시작한다. 심지어 모양도 랜덤이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쉬운 일 일수도 있다. 적당히 맞장구만 치면 될 걸, 그게 뭐 어렵냐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쩌겠나.
그렇게라도 말을 고르지 않으면 내 이름 석자 옆에
GAME OVER
'싸가지 없음'
타이틀이 달리게 될 텐데.
그에 비하면 식물을 대하는 건 한결 쉬웠다.
말을 하지 않으니 애써 대답할 말을 찾을 필요도 없고
속으로 날 어떻게 판단하고 있든 내가 그 속내를 알아차릴 일도 없다.
새순이 나온다고 앞에서 개다리춤을 춰도,
그러다 돌연 널브러져 꼼짝하지 않아도,
식물들은 그저 그러려니 한다.
정확히는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래서 편했다.
과도한 노력을 쏟아붓게 하지 않으면서도 촌각을 다투는 '정답'을 요구하지 않고, 내가 끔찍한 실수를 저질러도 대개는 만회할 기회를 주는, 그 너그러운, 혹은 무심한 성미가.
식물이 자라는 모습은 내가 식물을 대할 때 보이는 태도와 비슷하다.
조그마한 일에 안절부절못하고 뿌리가 상했나, 잎에 상처가 생겼나, 전전긍긍하면 꼭 그만큼 예민하게 군다.
반면, 살 놈이면 살겠지, 하고 적당히 무심한 태도를 고수하면 알아서 대충 살아남는다.
나는 식물에게서 그런 무심함을 배운다. 죽고 사는 문제만 아니면 어떻게든 되겠지, 뭐, 한다.
세상은 소란하게 무례하고 나직이 따뜻하다.
보는 눈은 예리하고 듣는 귀는 둔감하다.
화살처럼 던지는 말은 현명한 것이고
풍선처럼 띄워 올리는 말은 답답한 것이다.
그런 세상이다.
그래서 다행이다.
내게 위안을 주는 것이 단 몇 년 만에도 휙휙 바뀌는 세상이 아니라,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사람이 아니라,
몇십, 몇 백만 년을 변하지 않은, 그럼에도 살아남은, 말없는 식물이라서.
생각할수록 참으로 무심히 다행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