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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애틀 닥터오 Jan 18. 2021

너와 나의 선

아이없는 부부가 18년간 무탈한 비결

우리는 결혼한 지 이제 햇수로 14년 차가 되었다. 연애 기간 4년을 합치면 함께한 시간이 도합 18년이다.


어디를 가도 우리에게 신혼부부냐며 물어오는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면 좀 뜨악하기 까지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팔짱은 기본이고, 아직까지 손도 잘 잡고 다니고, 뽀뽀도 자주 한다. 그런 모습을 한 두 번이라도 본다면, 결혼 한지 얼마 안 된 늦깎이 새내기 부부라고 보이기 딱 좋다.


부모님들을 포함하여 여타 어르신들은 우리에게 아이가 꼭 있어야 한다며 우리를 걱정하셨다. 부부관계의 안전장치가 아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었다. 작은 문제든 큰 문제든 아이 때문에라도 헤어지지 않는다면 그걸로 괜찮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일부러 아이를 안 가진 것은 아니지만, 아이를 안전장치 삼아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우리는 둘이 함께 부대끼며 살아온 이 긴 시간 동안, 아이 하나 없이 왜 아직까지 이토록 잘 지내는지 골똘히 생각하며 열띤 토론을 한다. 좀 식상하지만, 함께 내린 결론 중 하나는 싸움에 있었다.  


우리는 연애 때부터 잘 싸웠다. 어떤 커플들은 아예 싸울 일이 없다고 하는데 존경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슨 재미로 사나 싶기도 하다.


우리는 격하게 자주 싸우기도 했지만, 싸움의 질이 대체로 온순했다. 다시 말해, 싸울 때는 공중으로 물건이 오가며 피 튀기게 싸웠지만, 넘지 않는 선들이 있었다.


첫 번째는, 인신공격의 선을 넘지 않았다. 배우자의 외도나 도박, 빚과 같은 큰 사건을 제외하고 결혼한 커플들의 끝을 보는 대부분이 이 인신공격이다. 현재 벌어진 사건만을 가지고 문제를 삼아야지 그 사람의 외모 비하나, 인격이 어떻다느니  출신이 저질이라느니 종자가 더럽다느니 부부간의 싸움에 유전자, 부모, 조상할 것 없이 불필요한 제삼자까지 들먹이며 싸우는 것은 답 없는 개싸움이나 다름없다.


두 번째는, 과거의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 현재의 문제를 가지고 싸우는 것도 벅찬 일인데,  과거의 문제를 들추는 것은 현 싸움의 원인도 찾지 못할뿐더러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 배우자 둘 중, 한 사람이 자꾸만 과거의 문제를 걸고넘어진다면, 예전 그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못한 것이리라. 현재의 문제를 일단 해결하고 난 후, 감정이 잦아들었을 때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과거의 문제를 다시 이야기하며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 중요하겠다.


세 번째는, 이혼이라는 선을 넘지 않았다. 어떤 종류의 싸움에서도 이혼으로 실마리를 풀어보려는 마음을 아예 삭제했다. 이런 마음에서는 싸움 도중, 이혼이란 말을 쉽사리 말을 꺼낼 수 없다. 지난날의 우리들의 싸움에서는 집을 나가버리겠다는 말은 했어도, 단 한 번이라도 실수로 이혼을 이야기한 적은 없다.


부부싸움 도중, 쉽사리 이혼을 들먹이는 것은, 살다가 문제가 생기면, 죽어버리겠다는 말을 쉽게 꺼내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관계의 죽음을 알리는 것과 같다. 싸움 도중 흔히들 나올 수 있는 농담 같은 말이지만, 우리는 그 말을 아꼈다. 부부 사이에 필요하면 언제든 말없이도 가능한 것이 이혼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네 번째는, 시간의 선을 넘지 않았다. 일단 싸우면 기본적인 전제는 ‘빨리 푼다’였다. 싸움이 가장 오래갔던 기간은 6일에서 7일이었다. 조금 길게 느껴지긴 하지만, 함께 공부하던 시절에는 정신없이 바빠, 일요일이나 월요일 저녁에 한번 싸우고 나면 화해할 시간이 없어 주말까지 기다려야 했다. 지금은 잘 싸움이 되지도 않지만, 화해할 때까지의 시간은 길어봐야 이틀이다.


싸움의 뒤풀이가 가장 짧을 필요는 없지만, 길면 길어질수록 힘들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시간이 길어지면, 싸움의 기억도 희미해지고, 싸움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점점 찾기 곤란해 지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커플의 존재 이유까지 들먹이며 불필요한 깊은 감정의 골에 빠져 대화의 단절이나 관계의 끝으로 치닫는 경우로 마무리되기도 한다. 관계를 끝내고 싶지 않은 것이라면 시간의 선을 잘 지켜야 한다.


다섯째는, 감정의 앙금을 선 밖으로 버리는 것이었다. 싸움의 끝에는 왜 싸웠는지, 무엇이 기분이 나빠졌는지,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에 관해 진지하지만, 조금 힘을 뺀 듯한 캐주얼한 대화를 하고 마무리했다. 특히 화가 많이 난 사람의 기분을 최대한 밖으로 끌어내어 대화로 분노의 열기를 빼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꺼졌다 생각되는 작은 불씨가 미래에 큰 재앙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런 선들이 우리의 관계를 잘 지켜주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남여 모두 이런 원칙을 지니고 싸움에 임한다면 일이 조금 수월하긴 하지만, 배우자 둘 다 이럴 필요까지는 없다. 둘 중 한 명이라도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면, 조금 인내가 요구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대방도 곧 물들게 되어 있다.


요즈음은 우리가 언제 싸웠는지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서로에 대한 부담감이나 긴장감은 거의 없다. 아니 아예 없다. 우리는 서로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좋지 않은 기분에 대해서 자주 묻고 점검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관계에 있어 서로에 대한 불편한 감정과 기분은 언제고 불덩이가 되어 활화산처럼 터질 수 있다. 어떤 커플들은 아예 이런 작은 불덩이들이 커져서 다 태우고 꺼지기를 반복하며,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살아가기도 한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에서는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커지기를 기다렸다가 나오는 감정들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후폭풍이 심할 수 있기 때문에 추천하지는 않는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커플들이 부부싸움에서 혹시 이런 선들을 잘 지키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어떨까? 이 선들을 조심한다면, 그동안 묵혀둔 부부 관계의 문제가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모든 커플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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