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는 자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첫 아이가 생겼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실패를 거듭할수록 오기가 생겨 누가 이기나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밀어붙였다. 내가 이겨보겠다고 억지를 쓴 것은 아니었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는 상황을 무시하고 계속 버텨나갔다는 말이 더 맞겠다.
사실, 하늘은 나에게 등을 돌렸다 싶어, 나 혼자 고집부리다 말자는 생각이어서 아이가 생기는 것은 예상도 하지 못했다. 모든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하라는 선인들의 말은 나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아이를 갖겠다 마음먹은 그때부터 긴 시간 동안 우울했고 낙심했다. 세월과 직업이 나에게 남긴 통증으로 괴로웠고, 시간에 맞춰 따끔한 호르몬 주사를 꼬박꼬박 맞으며 언제 올지도 모르는 아이가 나에게 과연 생길 것인지 수천번도 더 묻고 또 물었다.
하지만, 막상 아이가 생기고 보니, 기쁨보다는 ‘아, 이제 됐다.‘는 나 혼자만의 고요한 외침과 함께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나 이외의 모든 사람들은 기적같이 일어난 예상 밖의 일에 환호성을 지르고 기뻐했지만, 왠지 나는 그들과 함께 기뻐하기에는 힘이 남아 있지를 않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부탁했다. 시끄럽게 호들갑 떠는 축하는 자제해 달라고.
세상 뉴스는 증가하는 난임, 불임에 대해 시끄럽게 떠들어 댔지만, 내 주변의 사람들 중 난임과 불임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나만 평범하지 않았고, 나만 홀로 괴로워해야 하는 싸움이었다. 웃음이 나지 않았지만, 억지웃음을 웃어야 했고, 깊숙이 파고 들어오는 무례한 질문들에 쿨한 척 대답을 해야 했다.
30대 초반에 결혼한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을 했다. 아이가 생기지 않은 결혼 첫 몇 년 동안 학업에 매진하느라 아이 고민은 저 멀리 두어야만 했다. 한국에 있었다면 이렇게 오래 연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에서의 난임치료는 한국의 열 배 이상의 비용이 들었고, 학비와 생활비로 허덕이는 우리에게는 동떨어진 사치 같았다. 자본주의로 팽배한 미국은 돈 없는 우리의 아이 없는 사정을 반갑게 맞아 주지 않았다.
재정상황이 좋아진 어느 순간부터 미뤄둔 과제를 하려고 보니, 돈만 있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힘겹게 버텨낸 미국 삶의 찌든 때가 몸에 덕지덕지 붙어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몸이 이곳저곳이 아팠고, 수술을 해야 했고, 이름난 한의원에서 이러저러한 보약을 먹었고, 따로 또 식이 요법을 해야 했다. 아이를 낳은 모든 부부가 다들 이렇게 힘겹게 아이를 낳은 것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힘이 부칠 때마다 포기하고 싶었다. 그러기를 십 년이 지나고 인생과 기싸움을 벌이고 있던 나에게 예고 없이 아이가 찾아온 것이다.
막상 아이가 생기고 보니, 여기저기로부터 눈물겨운 축하를 받았지만, 나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마라톤을 뛰어 본 적은 없지만, 마지막까지 없는 힘을 끌어올려 완주를 하고 난 후의 기분이랄까. 사지가 제대로 붙어 있는지 아닌지,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는 코와 입,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옷만이 느껴질 뿐이다. 기쁘지만, 기뻐할 힘이 없어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바닥에 대자로 쓰러져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요한 하늘만 바라보는 그 순간은 사람들의 시끄러운 소리는 가쁘게 몰아쉬는 내 숨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그런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상태였다. 가뿐 숨만 몰아쉬는 그런 기분.
숨이 안정될 때쯤, 폐, 다리, 온몸 구석구석에서 아프다는 곡소리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내가 이 일을 왜 했는지,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생각도 하지 말 걸’이라는 후회는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리고 자책한다. ‘불가능한 일을 또 해 버리고 말았네! 아 지겹다. 이제는 좀 쉬자!’ 이런 일이 반복될 때마다 어려운 일도 마다하지 않는, 아니 어려운 일만 골라 찾아다니는 것 같은 나 자신이 좀 진절머리가 난다. 성취감에서 오는 기쁨을 만끽하느라 그 모든 과정을 잊어버릴 수도 있지만, 성취의 기쁨을 위해 어려운 일을 택했다기보다는 나의 쓸데없는 욕심, 오기, 혹은 나도 모르는 사이, 어려운 일에 중독된 것은 아닌지 나 자신이 의심이 되기도 했다.
아이가 세상에 나오고 나면 이런 고통과 고민들은 눈 녹듯이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렇게 위로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찾아온 인생의 큰 전환점에서 그간 지나갔던 나의 과거의 모습들, 그리고 사건들을 회고해 보며 지친 나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나는 불가능을 꿈꾸지는 않았다. 불가능이라고 말하는 나이에 아이가 생겼으니, 사람들은 불가능을 꿈꿨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난임부부들은 나를 통해 위로를 받고 불가능을 꿈꿀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난임과 불임의 문제는 지금까지 나의 인생에 있어 가장 어렵고 풀기 힘든 문제였다. 어쩌면 나에게는 실제로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불가능이 포기 없이 매진하는 내 인생에 마침내 답을 준 것이라 여겨진다.
세상에는 가능해 보이는 일이 더 수월하고 안전하고 예상할 수 있지만, 모두가 부정하는 일, 혹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것은 어렵고 위험하고 예상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그 길을 가겠다면 아무 말 없이 옆에서 묵묵히 지켜봐 주겠다. 그것이 나에게 필요했던 것이었으니. 끝까지 버티는 모두에게, 고통이 있다면, 그 고통이 하루속히 무뎌지고, 머리를 비워내고 곧 피날레를 만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