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결혼한 지 17년이 되었다.
17이라는 숫자가 주는 의미가 있는 것일까? 허풍쟁이 남자들 중에는 17대 1로 싸워 이겼다며 거짓말 같은 무용담을 늘어놓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17년 만에 이혼했다며 바람이 들려주는 소식을 듣기도 했지만, 우리는 결혼 17년 만에 아이가 생겼다. 결혼 7년 만에 아이가 생겨도 기적 같은 일이지만, 17년 만에 아이가 생긴 것은 무슨 설화에나 나올 만한 에피소드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임신은 결혼을 하고부터 계획했다 안 했다를 반복했지만, 전반적으로 항상 계획 속에 있었다. 너무 오래 걸려서일까? 감사와 기쁨으로 하루를 채워도 모자랄 판에 이유 없는 무기력증이 찾아왔다. 아이를 맞이하기 위해 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몇 주째 지속되고 있다.
누구는 딩크족이었지만, 갑자기 생각이 바뀌어 오십이 되기 바로 직전에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데 나는 그런 쿨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처음부터 딩크족도 아니었고, 생기지 않는 아이를 기다리며, 몸에 사리가 생겼으면 진작에 여러 개가 생겼을 판이다. 실망과 좌절의 연속이었고, 수치와 민망함, 아쉬움과 처연함이 곳곳에 자리하고 우리 부부를 괴롭혔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속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마흔을 넘기고, 일 년이 지날 때마다, 한숨 섞인 소리로 기도했다. ‘하나님, 올해도 한 살을 더 먹고 늙어가는데 언제 아이를 주실 건가요?’ 하나님은 답이 없었다. 하지만, 기도하며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언제고 아이가 생길 것이라는 미세한 그분의 음성이 있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매년 한해의 소원 혹은 목표는 ‘아이 갖기’로 몇 년째 같았다.
자기 연민에 빠지려는 순간들이 반복적으로 찾아왔지만, 툭툭 털어냈다. 울거나 우울해지지 않으려고 했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참 잘 참고 잘 버텨온 것이 기특하지만, 막상 아이가 있는 삶이 현실이 되려고 하니 책임이라는 것이 저 멀리 먼지를 일으키며, 지평선 넓게 행렬을 지고 몰려오는 천만 대군 같다. 나는 그 앞에 작은 활 하나 쥐고 있는 작고 미력한 궁수에 불과한 듯하다. 수만 군대가 밟고 지나가도 모를 그런 작은 병사 나부랭이 하나.
꾸준히 임신 육아 대백과 읽고, 베이비 위스퍼를 비롯해 유명하다는 육아서적들을 읽고 있지만, 정보를 섭렵하고 배우면 배울수록 어깨가 더 무거워지는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앞으로 달라질 나의 하루, 생각, 철학, 혹은 아무도 몰랐던 엄마라는 나의 모습 등등은 생각하면 할수록 답이 없다. 사실 깊은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나도 모르는 무의식 속에 이미 자리하고 있나 보다. 오늘부터 임신 막달이 시작되었지만, 이미 몇 주 전부터 무기력증이 시작되어 마음이 힘들어졌다.
아주 아주 다행히 입덧 없이 임신 초기와 중기를 보내어 운동도 부지런히 하고, 하고 싶은 일도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꾸준히 할 수 있었다. 초기부터 입덧이 있는 산모들은 이미 초반부터 힘들다고 했지만, 그와 반대의 시간을 보낸 나는 일상을 방해하지 않고 찾아온 아이에게 감사하며 집과 일터에서 나의 할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한 가지 제일 힘들었던 것은, 임신 초기부터 지금까지 밤중 소변으로 8개월째 잠을 설치고 있다. 7,8시간을 자면 두세 시간에 한 번씩 깨어 화장실을 간다. 아침이 밝아오는 새벽에 깨면, 다시 잠들기가 쉽지 않아 6시간도 채 못 자는 것도 다반사다. 남편은 아이가 태어나고 밤중 수유를 해야 하니 몸이 적응하려고 자연스럽게 연습시키는 것이 아니냐고 위로했지만, 잠을 못 자게 하는 걸 연습시키는 건 너무 가혹하다.
고령산모의 임신 당뇨를 걱정하는 의사는 지속적으로 운동하고, 음식조절도 하라고 당부했다. 의사의 말대로 참 열심히도 했지만, 이제는 만사가 다 귀찮다. 지속적으로 졸리고, 먹는 것도 귀찮다. 밥을 먹으면 더 졸릴 것 같아 오늘은 내내 곡기를 끊고, 과일과 야채, 단백질만 먹었다. 무기력한 생각을 멈추려고 일부러 집안일도 해보고 햇빛도 받으며 산책해 보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내 안에 악한 영혼이 나를 끊임없이 끌어내리는 것만 같다. 그게 아이는 아닌 것 같은데. 물론 호르몬 변화려니 이해하려고 하지만, 그 어떤 것에도, 그 누구에게도 노예로 살고 싶지 않은 나는 ‘호르몬 따위 물리쳐 버릴 테야’라며 씩씩하게 이것저것 해보지만 여전히 매분 매초 ‘하기 싫다. 하기 싫다. 하기 싫다.’는 소리가 내 머리를 가득 채운다. 이미 호르몬 따위가 내 몸을 점령하고 백기를 들라고 위협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몇 주째 백기 들기를 포기하고 방법을 찾고 있다.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어야겠다.
*이 글은 임신 8개월 즈음 플루 백신을 맞고 몸이 바이러스와 싸우느라 그랬는지 우울하고 무기력한 마음으로 쓴 글입니다. 모든 임신이 다 이렇지 않음을 알려드립니다. 현재는 아이가 벌써 출생 10주입니다. 피곤하지만,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간 밀린 글들을 조금씩 정리하며 포스팅 중입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