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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나 Jul 22. 2021

흙수저 공무원부부의 상가주택 건축기5

대출과 마이너스통장으로 2억짜리 땅을 사다

큰아이를 등원시키고 인근 부동산에 전화를 해서 아파트를 내놓았다. 2013년도에 이사 오면서 약간의 리모델링과 셀프 페인팅을 했지만 전체적으로 깨끗한 편이었다. 15층 아파트에 10층이라 층수도 좋고 완전 남향은 아니지만 남서향이라 오후 내내 해가 들어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오래 살 생각이어서 보일러도 교체하고, 가스도 인덕션으로 바꾸고 매일매일 쓸고 닦으며 살아온 곳이었다. 우리가 집을 팔 당시에 집값이 약간 하락세이기도 했고 높은 가격에 내놓으면 당연히 빨리 거래가 안 될 것이므로 시세에 맞춰 집을 내놓긴 했지만 빠른 거래를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 타협의 여지는 남겨놓았다. 집을 파는 입장에서는 이 집이 가장 좋은 집이고 높은 가격을 받고 싶겠지만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낮은 가격으로 좋은 집을 사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낮은 금리로 최대의 대출을 해준다던 공인중개사 아저씨가 소개해주기로한 은행은 요즘은 대출절차 및 내부적인 지침 변경으로 인해 그 조건이 불가하다며 공인중개사 아저씨의 전화를 받고 나니 헛웃음이 나왔다. 뭐지....결국 당한건가.... 다른 대안을 찾아야 했다. 여러 은행에 대출금리 및 조건을 알아보니 농협중앙회가 금리 및 조건이 우리와 가장 잘 맞았다. 최종 계약일까지 대출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고 연금대출 과 행정공제회 대출을 알아보는 것은 신랑이 맡기로 했다. 나는 절차와 서류 준비에 정말 잼뱅이지만 신랑은 꼼꼼하고 계획적이기 때문이다. 신랑은 본인의 꼼꼼함과 계획성을 여기에 쓰고 싶진 않았겠지만 이미 판은 벌어져 있고 이제 하나씩 수습해 나가야 할 단계였다.


 


그럼 내가 할 일은 무엇이냐. 이제 현재 아파트를 잘 팔기 위해 언제라도 매수자에게 집을 보여줄 수 있도록 집을 정리하고 깨끗이 할 것. 언제라도 팔릴 것을 대비해 집을 짓기 전까지 거주할 수 있는 집을 알아볼 것. 어떤 집을 지을지 대충의 윤곽을 잡아 놓을 것. 건축업자를 알아보고 건축비가 얼마나 들지 대충의 견적을 받을 것. 그러나 이때도 내가 알지 못한 것, 정말 간과하고 있었던 중요한 하나가 있었다는 게 뭐든지 ‘대충’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 이 대충이라는 말이 얼마나 무섭고 대단한 것인지를 전혀 몰랐다는 것이었다.


 


2억의 매매금액에 취등록세, 부동산 중개비용, 등기비 등등을 합하면 2억 천만원정도가 필요했다. 그 당시 대출시세(?)가 좋았었던 건지 아니며 부동산규제등이 심하기 전에 거래를 해서 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건지 은행에서는 1억5천만원까지 대출이 가능하다고 했고 그럼 우리는 일단 땅 매매시에 필요한 현금은 이미 지급된 가 계약금을 제외하고 5천만원이었다. 담보대출 이자는 신랑이 농협카드를 쓰고 월급통장으로 바꾸고, 공과금이나 매달 고정적으로 나가는 지출에 대해 7건 이상 자동이체를 걸어놓고 하는 등의 조건을 충족하니 3%초반대의 이율이었다. 다른 은행의 3%후반이나 4%초반 이율에 비하면 꽤 괜찮은 이율이라고 생각했으나 행정공제회, 마이너스 통장 대출이자를 포함해서 우리의 첫 이자는 60만원대 였다. 우린 80평짜리 빈 땅이 생김과 동시에 60만원이 매달 감쪽같이 사라지는 돈이 된 것이다. 종종 한숨이 나오긴했지만 그 당시엔 이 불안감과 아랫집에 대한 스트레스를 벗어 날 수 있다는 것만이 나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리고 대출을 제외한 땅 거래시 필요한 현금은 신랑이 마이너스 통장과 대출 절차가 다소 간소한 행정공제회 대출을 이용했다. 그 당시 마이너스 통장과 행정공제회 대출의 이율은 3% 중반대였다. 역시 서류준비와 대출 절차는 신랑이 맡았다. 나는 일을 벌리고 신랑은 수습하는 쪽이었다.



모든 준비는 잘되어갔다. 땅을 매수하기 위한 돈은 담보대출이 많이 되어서 실제로 우리가 필요한 현금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물론 신랑월급의 거의 1/5에 해당하는 이자가 매달 나갈 뿐이었다. 그뿐이었다. 좀 덜쓰면 되었다. 그 돈이 없다고 죽지 않았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없으면 없는대로 다 살아졌다. 그리고 땅을 사서 우리집을 짓는다고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했다. 하우스 푸어의 삶이라는 또 다른 불안감이 사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올라왔지만 아랫집 스트레스에 비하면 그건 내가 감당하기가 훨씬 편안했다.


 


 당시엔  워낙 번갯불에  구워 먹듯 모든 일이 진행되어서  몰랐는데  글을 쓰려고 신랑의 입출금 내역을 받아보고 나서 나는 깜짝 놀랐다. 10 중순쯤 처음 부동산에 다녀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11 15일에 매도자에게 천만원을 입금한 내역이 있었다. 계약금이었다. 돈도 없는 주제에 2억짜리 땅을 사는 것을 결정하는데  달도  걸리지 않은 것이다. 사실  땅을 사기로 결정한  부동산 아저씨가 나에게 던진 미끼 같은 전화를 받는  순간이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나는 신랑에게 입금내역을 건네받고 어떻게 내가  정신으로  모든 것을 진행할  있었는지가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11 26일까지 행정공제회 대출  담보대출 관련 절차  서류를 준비를 완료했다. 11 27 농협중앙회에서 신랑, 어머님, 매도자, 공인중개사아저씨가 만났다. 은행에서 매도자에게 15천만원을 입금했고 행정공제회에서 대출받은 돈과 마이너스 통장으로 남은 5천만원을 입금했다.


 


나는 집에서 둘째 아이를 돌보고 있었다. 계약이  성사되기를 바라기를 기도하면서. 둘째를 등에 업고 집안을 서성이며 신랑의 전화를 기다렸다. 은행에서 서류가  정리되었고 며칠 뒤에 등기부 등본을 떼보면 된다는 신랑의 전화를 받고 나는 기분이 좋았었는지, 마음이 홀가분해졌는지, 앞날을 걱정했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과정을 지나면서 어떤 기록이나 메모를 해놨으면 좋았을  그땐 아이들도 어리기도 했고 어떤 메모나 기록을 해놓을 여유조차 없었다. 그리고 이런 글을 쓴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당시에는 8개월된 둘째 아이가 사경 진단을 받아 일주일에 두어 번씩 대학병원에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니던 시기이기도 했다. 엄마 껌딱지인 첫째와 물리치료를 시작한 둘째를 키우면서 심신이 모두 지쳐있던 시기에 이런 일을 벌였다는 사실에 나조차 믿을  없을 만큼 놀라며 과거 일들을 하나씩 복기하는 중이다. 4년의 육아휴직 시기를 보내며 연이은 출산과 육아에 심신이 너무 지쳐서 나의 정신을 어디로 돌려놓을 도피처가 필요했던 걸까.  도피처가  땅이었을까.

 

아이의 파란만장한 놀이의 날들이 우리집 건축기와 닮았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11월 30일 등기부 등본 확인 결과 내가 구원의 빛을 보았던 그 땅은 신랑 명의가 되어있었다. 땅 구입 기는 집 짓는 과정에 비하면 아주 순탄한 과정이었다. 이제 곧 파란만장한 건축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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