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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나 Jul 18. 2021

엄마와 아이의 공존의 시간

- 엄마가 되어가는 시간

후끈한 열기와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빛의 기운 때문인지 아직 피곤함이 가시지 않았는데도 눈이 떠졌다. 거의 매일 비슷한 패턴이다. 오늘은 햇살이 더 강한걸 보니 평소 일어나는 시간보다 조금 늦은 것 같다고 무거운 몸을 일으키며 생각한다. 아이들과 신랑은 아직 한밤중이다. 에어컨을 켜고 백색소음을 약하게 켜놓고 안방 문을 살며시 닫고 거실로 나온다. 둘째는 유난히 잠귀가 밝기 때문에 우리집에선 아직 백색소음이 필수다. 시계는 7시 20분을 가리킨다. 평소보다 한 시간쯤 늦은 시간이다. 그러나 오늘은 토요일이니 마음이 여유롭다. 어제 늦게 자서 피곤하니 소파에 누워 인터넷이나 할까 하면서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가 금방 다시 벌떡 일어난다.  

  

한참을 쉬다가 다시 시작한 새벽걷기 아니던가. 여기서 흐름을 놓을 순 없다며 내가 다시 나를 다독인다. 한순간 게을러져 소파에 벌러덩 누워버리는 것도, 다시 벌떡 일어나 운동을 할 생각을 하는 것도 모두 내 마음의 한 끗 차이인 것이 라는 걸 알면서도 매일 흔들리는 내가 있다. 작은방 옷걸이에 걸어놓은 요가 바지를 입고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품이 큰 반팔티를 입고 양말을 신으려는데 안방에서 둘째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엄ㅁㅁ마아아아아~~”    

아이가 눈을 떴을 때 내가 옆에 없으면 꼭 저렇게 소리를 지르며 울어버린다. 첫째가 깰까 봐 신던 양말을 던져버리고 안방 문을 살며시 연다. 침대에서 짜증과 함께 뒹굴거리는 둘째를 얼른 안아 거실로 데리고 나온다. 아이는 눈곱 낀 눈을 비비며 슬며시 웃는다. 오늘 운동은 망했구나 싶어 짜증이 올라와 괜히 일찍 깨어난 둘째가 미워진다. 지난여름에도 일찍 일어난 둘째 때문에 나의 새벽걷기는 자주 엉망이 되곤 했다. 몇 달 동안 열을 올리며 걸었던 새벽걷기는 둘째의 잦은 이른 기상으로 결국 막을 내렸다. 이제 일주일도 채 못 걸었는데 다시 또 나는 여기서 포기해야 하는 건가.     


일을 하면서 아이를 키우며 가장 힘든 건 체력이었다. 체력이 따라주지 않으니 모든 일에 의욕이 없어지고, 의욕이 없어지니 삶의 만족도와 행복감도 떨어졌다. ’인간은 왜 사는가 ‘같은 철학적인 의문이 올라오면서 아무것도 의미 없어 지곤 했다. 복직한 지 7개월을 갓 넘었을 때 심한 폐렴을 앓았다. 전국적으로 코로나가 심해지던 시기에 열이 40도까지 오르고 기침도 심해서 코로나 검사도 2번이나 하며 정말 코로나에 걸렸을까 봐 밤새 혼자 방에서 울었다. 혹시나 싶어 아이들과 신랑을 시댁에 보내고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혼자 까만 밤을 꼬박 지새우며 몸과 마음 모두 만신창이가 되었다. 의사는 두 번의 코로나 검사 결과가 음성임에도 코로나를 의심하며 진료를 거부하는 듯하더니 우는 아이 떡 하나 쥐어주는 것처럼 선신 쓰듯 폐렴 약을 지어주었고, 약을 받으러 간 약국에서는 요즘 젊은 사람은 폐렴에 잘 안 걸리는 어쩌다 폐렴에 걸렸냐며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며 밥 잘 챙겨 먹고 운동을 하라며 여러 번 당부했다. 심하게 앓고 난 후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아프니 집, 아이들, 일 모두 엉망이었다. 아니 내가 아프니 내가 죽을 것 같았다. 몸이 아프니 마음까지 너덜너덜 해졌다.    


한 달 가까이를 앓고 난 후 아이들 밥 먹이고 챙기느라 아침에 물 한 모금 마시지도 못하고 출근해 커피믹스로 쓰린 속을 더 쓰리게 만들었던 날들을 뒤로하고 아이 아침밥을 챙기는 것 못지않게 내 아침밥도 사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새벽걷기 또한 시작했고 새벽걷기와 아침밥의 위력은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다시 몸과 마음의 근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몸과 마음의 근력이 어느 정도 키워져 조금 살만해지자 다시 게으름과 차고 넘치는 핑계들이 내 발목을 붙잡았고 결국 둘째의 이른 기상과 추위를 이기지 못해 새벽걷기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러다가 근 9개월 만에 다시 시작한 새벽걷기였다. 다시 걷기 시작한 지 이제 겨우 5일째였다. 그때처럼 다시 멈춰 설 텐가. 키는 내가 쥐고 있었다. 옷을 벗으려다 아이를 쳐다봤다. 아이는 아무 잘못이 없다. 푹 자고 일어나 보고 싶은 엄마를 찾았다. 엄마가 안아주니 웃었다. 아이를 미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아이에게 물었다. “엄마랑 산책 갈까?”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경쾌하게 대답했다. “응 좋아!” 짚어 던진 양말을 다시 신었다. 아이 옷을 입히고 모자를 씌운다. 마스크 스트랩을 목에 걸어준다. 우리는 함께 신발을 신고 함께 문을 나섰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아이와 나는 손을 잡고 집 앞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아이와 천천히 운동장 한 바퀴를 돌았다. 아직 걸음이 느린 아이와 함께 운동장을 걸으니 매일 걷던 그 운동장도 새롭다. 아이는 나무 그늘이 진 운동장 모래장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민우 여기서 모래 놀이하고 있으면 엄마는 저까지 운동하고 올게” 집에서 노는 것보다 나가서 노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아침 댓바람부터 엄마와 산책에 모래놀이라니. 아이는 신이 나서 얼굴이 복사꽃처럼 환하다. 내가 운동장을 한차례 걸어갔다 오는 동안 아이는 모래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모래 안에 고사리 같은 손을 넣고 두꺼비를 부른다. 헌 집 줄 테니 새집 달라고. 운동장을 크게 돌면 아이가 시야에서 잘 보이지 않아 운동장 가로의 끝과 끝을 왔다 갔다 한다. 다리를 들어 올리고 팔을 흔든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쉰다. 온 동장 끝에서 아이는 신나게 모래놀이를 하고 나는 걷는다.     


아이와 나와 공존의 시간. 아이와 나는 서로 도와 그렇게 함께 존재했다. 지금까지 나는 아이와 공존할 수 있었음에도 그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아이가 내가 하는 활동들에 성가신 존재로 여길 때가 많았다. 저녁 요가 수업 한 번도 가기 힘들다며 매일 투덜대는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충분히 공존할 수 있었다. 운동복을 입고 유모차를 힘차게 끌며 달리던 금발의 어떤 여자의 모습이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결국 내 마음의 문제였다. 아이와 나를 분리해서 생각하던 나는 아이와 함께라면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틀 속에 나를 가두고 있었다.     


나와 아이는 다른 존재이지만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다. 영원히 함께 살아가는 존재는 아니지만 앞으로 10년 이상 우리는 함께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건 어떤 물질적인 것도 아닌 서로가 함께 존재하기 위해 서로를 도와주는 마음이다. 이건 내가 아이를 키우며 얻은 어떠한 깨달음보다 놀랍고 중요한 깨달음이었다. 내가 아이를 키우는 게 아니라 우리는 함께 커가는 존재였던 것이다. 머리로는 알면서 마음이 받아들여지지 않던 지난날이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던 괴롭고 외로운 날들에 서 벗어나 이제 진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딱 내 경험치만큼만 알 것 같았다. 눈은 아이를 향하며 팔과 다리를 힘차게 흔들며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인 만큼 말이다.     

아침 모래놀이를 좀 즐길줄 아는 우리 둘째

아이의 옷과 신발은 모래로 범벅이 되어 털어도 털어도 모래가 계속 흩날렸다. 아주 오랜만에 손빨래가 필요하겠다. 20분의 짧은 시간이지만 아이는 신나게 모래놀이를 했고 나는 등에 땀에 송골송골 맺힐 만큼 딱 적당히 걸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걸으면 개운하겠지만 우리의 공존의 시간은 여기까지가 딱 적당하다.   

  

 첫째가 일어나 나를 찾을 터였다. 이미 깨어나 나를 찾으며 한바탕 울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아이의 눈을 바라보고 이렇게 이야기해줄  있을  같다. “엄마가 운동을 하고 싶었는데 민우가 일찍 일어나서 엄마랑 함께 산책을 다녀왔어. 다음에 엄마가 책을 사러가고 싶을  민제랑 같이 가자. 엄마는 민제랑 하는 서점 데이트가 가장 행복하더라그렇게 우리는 또다시 함께  것이다. 부끄럽지만 고백하건대 나에겐 아이들을 족쇄처럼 여겼던 지난날들이 있었다. 그런 마음이 죄스러워 처음 엄마가  어떤 여자의 외롭고 슬픈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엄마와 아이가 공존하는 방법을 이제 조금은   같았다. 함께 행복한 방법, 함께 커가는  시간들의 의미와 존재를 엄마 나이 7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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