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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나 Jul 13. 2021

흙수저 공무원 부부의 상가주택 건축기1

- 층간소음, 그 분쟁의 나비효과

                                            

결혼하고 육개월 즈음이었다. 퇴근을 하고 조금 지친 몸으로 엘리베이터에 타며 10층 버튼을 눌렀다. 뒤이어 50대 중반즈음 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연이어 엘리베이터에 타더니 9층 버튼을 눌렀다. 나는 이사를 온 후로 한 번도 우리 아래층에 사는 이웃이 누군지 본 적이 없었기에 혹시나 우리 아래층에 사시는 분인가 싶어 웃으며 인사를 건냈다.


“901호에 사세요?1001호에 이사 온지 좀 되었는데 처음 뵙네요. 안녕하세요~”


그런 나의 웃음이 무안하게 아주머니는 무미건조 하다 못해 균열을 일으키는 차가운 어조와 눈꼬리를 올린 매서운 눈으로 나를 쳐다 보며 말했다.


“혹시 애기 있어요? 전에 살던부부는 아이가 없었는데”


잠깐 스친 생각에 지금까지 두어번 3살배기 조카가 한 두 시간 집에 놀러 왔던 적이 있었다. 아주머니의 어조와 눈빛에 이미 압도당한 나는 이상하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가끔 조카가 놀러온적은 있는데 아이는 없어요..”


기어들어가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9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아주머니는 어떠한 대꾸도 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닫힘 버튼을 눌러서 빨리 그 상황을 벗어 나고 싶었지만 나는 자동으로 문이 닫힐 때까지 손과 발이 얼어붙은 사람처럼 그대로 서 있다가 10층을 알리는 엘리베이터의 “땡” 소리와 함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당황스럽기도 하거니와 어안이 벙벙했고, 그 날 이후 아래층 아주머니는 나에게 아주 불편하면서도 무서운 존재로 각인되었다. 퇴근한 신랑과 엘리베이터사건 이야기를 하며 조카를 집에 데려오지 않아야겠다고 이야기하며 그날은 마무리 되었지만 그땐 예상하지 못했다. 오후 내내 햇살이 가득 들어와 온 집안을 가득 품은 이 집에서, 우리부부의 2박3일간 페인트여정을 함께한 우리의 첫 집에서 절대 남자 아이 둘을 키우며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린 2년정도 아이가 없었고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서야 집에 들어왔기때문에 아랫집과 부딪힐 일도 마주칠 일도 거의 없었다. 일년에 서너번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아랫집 아주머니는 매 번 싸늘하고 굳은 표정으로 인사 조차 하지 않았지만 나는 최소한의 예의로 목인사만 했다.  왜 그렇게 항상 화가 나 있었는지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집에서 이사 나온지 2년이 넘은 지금도 한 번씩 아주머니의 얼굴이 생각나면서 괜히 등골이 서늘하고 마음이 불편하다.


둘째가 겨우 앉아 있던 시절, 집은 항상 엉망진창이고 나는 매일 육아와 집안일에 허덕였지만 가장 많이 웃고 울던 날들
큰 아이가 4살, 둘째가 8개월쯤 우리집 거실 풍경

아이를 낳고 첫째아이가 4살이 될 때까지 우리는 최대한 조심히 지냈다. 우리부부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고, 아이가 조금이라도 집에서 뛰는 행동을 할 땐 아주머니의 싸늘한 표정이 어른거려 아이에게 여러번 당부를 하고 주의를 주었다. 거실과 안방, 작은방에 매트를 깔고, 밤에는 일찍 재우고, 집에서는 뛰지 못하도록 아주 어렸을 때 부터 아이에게 주의를 줬고, 그 문제로 아이와 우리 부부 서로가 스트레스를 받긴 했지만 공동주택에 사는 예의라 여기고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하고 지냈다.



그래도 아랫집은 당연히 불편한 점은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조심하고 노력한다고 한들 아이는 돌발상황을 만들기도 했고 매트만으로 해결 안 되는 층간소음의 문제점들은 여전히 존재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정말 일년에 한 두 번 조카들이 놀러왔을 때, 아이가 신나는 기분에 매트위에서 춤을 춘다고 콩콩 거렸을 때 아랫집 아주머니 또는 그 집 아들이 올라 와 여러 번 좀 조용히 좀 해달라고 애를 잘 단속하라며 차갑다 못해 경멸하는 듯한 눈빛을 우리에게 보내는 사건들은 우리 가족을, 특히 낯가림이 심하고 숫기가 없는 큰 아이를 주눅들게 만들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미안하다 사과하고 조심하겠다고 이야기하고 상황은 종료 됐지만 이사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었다. 불편했고 불안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이사를 갈 수도 없다고 생각했고, 우리가족은 그저 우리집이 좋았다. 작지만 따뜻했고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낳고 슬픔과 기쁨을 함께했던 우리집에 우리부부는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조심하고 조심하다 다시 불편한 상황이 왔을 때 아랫집에 대한 사과와 아이들에 대한 다그침으로 그 불편한 상황이 지나면 다시 일상을 살아 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 건 둘째가 8개월즈음이었다. 이른 저녁시간 이었다. 신랑이 일찍 퇴근한 저녁, 첫째는 유난히 신이 났고 좋아하는 자동차 장난감에서 흥겨운 노래가 나오자 어깨를 들썩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왜 매트가 안 깔린 그 작은 공간에서 춤을 췄을까. 춤추는 형을 보자 덩달아 신이 난 둘째는 엎드린 채로 작은 발을 통통거리며 굴렸다. 아이의 그 작은 움직임까지 나는 괜히 불안했다. 지금까지 크게 표출은 안했지만 소소한 행복의 순간에도 불안함을 느낄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것이었다.



불안한 예감은 왜 항상 빗나가지 않을까. 잠깐의 행복을 누릴 새도 없이 “띵동” 벨소리가 들렸다. 신랑과 나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고 신랑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지금 이 상황이 아랫집에서 올라 올 상황이라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고 이런 불안함과 피로한 상황들을 이제는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신랑이 문을 열었고 아랫집의 아들은 낮은 목소리로 “좀 조용히 좀 해주세요. 참다가 올라왔습니다” 그 뒤로 그 남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신랑은 또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지만 신랑과 그 남자는 서로 평행선을 그은 다리의 반대편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듯한 상황이었다. 우리가 '결국은 이사'라는 결론을 낼 수 밖에 없었던 잊지 못할 기억이지만 잊고 싶었던 일이여서인지 그날의 기억은 신랑과 나 둘 다에게 흐릿하면도 기분이 아주 좋지 않은 잔상만 남아있는 기억이다.



그날 저녁 우리 부부는 이사를 가야하는 이유와 대책에 대해 심각하게 이야기했다.  우리집은 그 당시 시세로 1억2천만원 정도 였는데 당시 5천만원의 대출금이 남은 상황이었다. 내가 오랫동안 휴직을 하기도 했고 신랑 혼자 번 돈으로 대출이자를 갚아가며 4식구가 생활해야 했기에 저축해 놓은 돈도 없었고 양가에서 도와줄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이 상황을 벗어날 하나의 방법은  이사밖에 없었고 갑자기 이사를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오래오래 산다고 생각했던 첫 신혼집에서의 행복한 시간들이 한순간 무너진다는 우울함과 생각지도 못했던 앞으로의 어떤 막막함 가득한 일들에 대한 도돌이표 같은 이야기만 오갔다.



다음날은 내년에 유치원에 입학하는 첫째 아이의 유치원 상담날이었다. 둘째를 시댁에 맡기고 유치원 두 군데를 급하게 상담하고 난 뒤였다. 같은 동네이지만 동네의 번화가가 아닌 약간 변두리에 초등학교가 하나 있었는데 예전부터 막연하게 인성을 중시한다는 그 학교를 보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유치원 상담을 하고 시댁으로 바로 가려다 그 학교 주위를 차로 한 바퀴 돌았다. 학교 주위에는 빈 땅들이 여기 저기 눈에 띄었다. 농사를 짓다 만 흔적들, 빈 땅 앞에 방치되어 쌓여있는 쓰레기, 지저분하고 무성한 잡초가 가득한 땅들이었지만 나는 그 땅들에서 어떤 빛이 느껴졌다. 우리가족을 불안감과 불안에서 구해줄 구원의 빛말이다.


‘이 근처에 작은 집을 지어 살면 좋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듦과 동시에 나는 학교를 돌아 나와 큰 길에서 바로 보이는 공인중개사 사무실 앞에 주차를 했다. 오늘 당장 부동산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지만 이상한 기운이 나도 모르게 나를 어디론가 이끌고 있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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