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에 관한 이야기 1.
매일 아침 특별할 것 없으면 기상과 함께 3Km씩 뜀걸음을 뛰고 부대로 출근했다. 오후 체력단련 시간이 시작되면 대대 단위 뜀걸음 3Km, 중대 단위 뜀걸음 3km 로를 뛰었다. 잠을 자기 전 3km 뜀걸음 측정을 끝으로 하루의 뜀걸음을 끝낸다. 이렇게 하루 최소 12km씩 달렸다. 날이 거듭될수록 목표지점으로 가는 시간은 짧아졌지만 달리기에 대한 내 애정을 멀어져만 갔다. 더불어 산에 위치한 부대이기에 뜀걸음 코스는 급경사가 반복됐고 이로 인해 뛰면 뛸수록 허리와 무릎 통증이 심해졌다. 통증을 그대로 지닌 채 10kg 군장을 메고 5km를 달려야 하는 산악 급속 행군 훈련도 해야 했다. 결국 내 무릎은 산악 급속 행군을 버티지 못하고 연골이 고장이 났다.
의사 선생님은 내게 무리해서 절대 뛰면 안 된다는 진단을 해주셨다. 하지만 나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남들보다 못 뛰었고, 남들보다 못 뛰면 안 되는 사람이었고, 뛰기를 쉬어서도 안 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진통제에 의지한 채 매일 똑같이 뛰고 또 뛰었다. 정말 뛰고 싶지 않았지만 뜀걸음을 그만둘 수 없는 내 상황이 너무 증오스러웠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책을 통해 긴 이야기를 전하고 독자들에게 달리기 열풍을 불어넣었다. 만약 달리기를 증오하던 그 시절로 시간을 돌려 내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책을 쓴다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절대로 달리기를 할 수 없게끔 썼을 것이다.
전역을 하고 뜀걸음이 아닌 달리기를 할 수 있게 됐지만 뜀걸음으로 얻은 무릎 통증 때문에 쉽게 달리기를 할 수 없었다. 막상 달리지 못하게 되니 달릴 때의 느낌이 그리워졌다. 뛸 때면 뿜어져 나오는 아드레날린은 물론이고, 귀에 꽂은 이어폰 음악에 맞춰 춤추듯 뛰는 자유로움이, 상상 속 달리기 상대와 경쟁하며 뛰는 즐거움이, 흐르는 땀만큼 살이 빠졌을 것 같은 행복한 기대감이 그리웠다. 한 여름 한참을 걷고 나서 느껴지는 갈증만큼 달리기에 대한 갈증이 깊어질 때쯤 크로스핏을 시작하게 됐다. 달리기를 하고 싶어 시작한 크로스핏은 아니었지만, 마침 달리기는 크로스핏에서 취급하는 수많은 운동 중 하나였다. 그리고 크로스핏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달리기가 포함된 WOD(Workout of The day)를 수행하게 됐다.
그날 오랜만에 달리는 것이었지만 자신감은 넘쳤다. 달리기는 안 했지만 운동을 쉰 적도 없었고, 체중도 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매일 뛰던 그 거리에 비하면 굉장히 짧은 거리였기 때문에 자신감이 넘칠 수 있었다. 젠장, 몇 미터도 가지 못하고 속도는 절반 이상으로 떨어졌고 자신감은 그냥 오만함이었음을 깨달았다. 군장을 매고 뛰는 것처럼 몸은 무거웠고, 다리는 누군가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처럼 바닥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고, 초당 오조오억 번씩 가파른 호흡을 내쉬었다. 그럼에도 걷거나 멈추지 않았다. 내 몸 상태와 페이스에 맞춰 기록에 얽매이지 않고 뛰는 그 순간이 너무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 즐거움에 취해 쉬지 않고-걷지 않고 완주할 수 있었다. 비록 달리기가 끝나고 무릎 통증이 몰려왔고, 기록도 억지로 뜀걸음 하던 그 시절에 비하면 비교조차 안되게 저조했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다시금 꾸준히 뛸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빠르게 뛸 때 느껴지는 폐에 고통을 참으며 뛰지는 못하겠지만, 천천히 내 속도로 꾸준히 자유롭게.
그리고 지금은 그날의 확신처럼 빠르지는 않지만 꾸준히 내 속도로 자유롭게 달리고 있다. 더불어 미한과 함께 달리며 미한의 속도에 맞춰 달리며 누군가와 함께 달리는 즐거움도 알게 됐다. 미한과 달릴 때면 다소 위험하긴 하지만 뒷걸음치며 미한의 얼굴을 보며 달리기도 하고, 최선을 다하는 듯한 미한을 내 카메라에 담으며 달리기도 한다. 때로는 지친 미한을 위해 응원과 함께 오두방정 춤사위를 추며 달리기도 한다. 여러모로 뜀걸음에 대한 나쁜 기억을 조금씩 닦아내고 달리기에 대한 좋은 기억으로 채워나가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