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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몬 베유 Oct 13. 2024

어떤 재미는 나’만’의 재미일 수 있다.

재미는 어떻게 삶을 바꿨나(7)

어떤 재미는 나’만’의 재미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회사를 나가고, 회사에 있는 All time이 모두 재밌는 시간이진 않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미친 사람이 아니었고, 업무에서 얻는 도파민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름대로 한계가 있었습니다. 첫날부터 교육 없이 실무에 던져진 저는 혼자 살아남아야만 했고… 홀로 업무라는 아마존에 던져진 저는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이슈라는 악어 떼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맹수들의 습격을 잘 대처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럴 때일수록 더 재미를 찾는 법. 재미로 문제를 해결했던 제 방식은 이번에도 다시 마음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회사가 답답하고 재미없으면… 아무래도 내가 뛰어야겠지-?’라는 생각이 들며 ‘답답하면 니들이 뛰던가-‘라는 어떤 명언이 생각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시도는 처참히 망했습니다. 어느 정도냐면 재미의 실패어가 ‘시작조차 하지 않음’이라는 이라는 깨달음을 얻을 정도로 처참히 망했습니다. 저는 이전까지 재미의 실패는 ‘지루함’이라고 생각했어요. 처음 한 게임이 재미가 없으면 우리는 핸드폰이나 컴퓨터를 꺼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재미있다면 실패해도 계속 도전하죠. 리그오브레전드에서 최악의 팀원을 만나도, 축구에서 7:2 스코어라는 최악의 패배를 경험해도 우리가 그 콘텐츠를 끊지 못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재미’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취업하자마자 ‘책모임’을 시도했기 때문이에요. 물론 사내 이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사실 많지 않습니다. 제가 시도조차 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위풍당당 ‘내 판’이라고 생각하고 입사한 신입 0년 차 사원은 들어가자마자 소위 책 읽는 사람들을 탐색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제 재미는 책을 읽고 나눔을 하는, 대화의 재미였죠. 책모임의 재미를 아는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해선 두 특성이 필요했습니다. “대화를 좋아한다.” 그리고 “책을 좋아한다”. 실제로 모색해 보니 몇몇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몇 년 동안 책모임을 진행한 ‘짬바’가 빛을 발했습니다. 예민한 감각으로 ‘아- 저 사람…!’ 싶은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간과한 게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먼저 ‘일이 너무 바쁘다’라는 엄청난 문제를 파악하지 못했던 거죠. 저희 회사는 정말 업무량이 많았어요. 물론 안 많은 회사가 어딨겠냐마는, 회사에 와서 잠깐 일하면 밥 먹을 시간, 잠깐 일하면 퇴근시간이었어요. 콜센터보다 업무량이 많은 날이 수두룩했습니다. 부서마다 업무량이 다르긴 했지만 많은 양의 일들 속에서 독서모임은 사치였어요. 


두 번째로 제가 하려던 책들은 재미가 없었습니다. 빠르게 선택하여 결과를 내야 하는 스타트업 특성상 저희가 추구하는 재미와는 멀었습니다. 깊은 인문학책이나 연결되어 있는 책으로 책모임을 진행해도 활용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였습니다. 차라리 빠르게 성장하는 스타트업에 대한 책들이 더 효과적이었어요. 처음에는 인문학책이나 인문학과 업무가 연결되어 있는 책들을 슬쩍 발 올리듯이 올려봤지만 역시 어림도 없었습니다. 같이 일하는 분들도 아신 거 같아요. 아- 이거 재미는 없겠다-라는 사실을요.


이런 의미에서 깨달았던 사실이 바로 재미의 실패는 ‘따분함이 아니라 시작조차 하지 않음-‘이었습니다. 언제나 재밌는 일들은 한 명, 두 명이 착착 붙기 시작하고 그 수가 불어납니다. 서로 하고자 하는 마음이 모여 시작점이 생기면 트렌드를 따라 한 명, 두 명씩 붙어서 모임이 추진돼요. 심지어 재밌어 보이는 모임은 엎어지고 사라지려고 해도, 어떻게든 계속해서 꾸준히 추진됩니다. ‘다시 시도하시겠습니까?’라는 팝업창이 떴을 때 다들 같이 “예”를 누르는 것이고, 내 눈앞 화면에 붉게 “패배” 문구가 나타나도 다시 게임을 잡는 것처럼 말이에요.

패배-가 떴음에도 우리가 다시 '계속'을 누르고 게임을 시작하는 이유는 그 게임이 재밌어서가 아닐까요?


물론 제 즐거움 중 하나는 책모임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곳에 가서 사람들을 물색하고 모았어요. 커뮤니티와 같은 넓은 공간에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책, 영화, 콘텐츠를 가지고 하는 대화들이 꽤 재밌었어요. 의미도, 도파민도, 재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넓은 공간에서 많은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제 재미는 한정된 공간과 한정된 사람 속에서는 불가능했어요. 업무는 몰아치고, 밥 먹을 시간도 겨우 있고, 간간한 야근이 있어 집 가기 바쁜데 책모임이라는 건 현실적으로 재미의 영역이 아니라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요인이었습니다. 차라리 책모임을 가장해 대화모임을 하거나 농땡이를 피는 모임이라면 모를까.


저는 그제야 내가 재밌는 것만 할 수 없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아니, 정확히는 다른 사람들의 상황과 방향에 맞춰야 함께 재밌을 수 있다-라는 사실을 알게 돼요. 이걸 이제야 느끼나- 싶기도 하시겠지만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아요. 저는 제가 저의 재미를 중심으로 불러 모으는 방식으로 진행하면서도, ‘굳이 안 하면 나 혼자라도 하면 되지-‘ 싶은 마음이 있었거든요. 그렇다 보니 어떤 제한적인 상황에서의 재미, 특히 함께해야만 하는 상황에서의 추구한 적이 없었다 보니 처음으로 실패를 겪게 됩니다. 


책모임을 통해 재미를 얻고 인정도 받던 저는 생각보다 실패감이 컸어요. 처음으로 겪은 어떤 실패였으니까요. 그러나 더 큰 감정은 절망이었습니다. 직장 내 커뮤니케이션에서 얻을 재미가 사라질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요. 제가 재미있어하는 길은 그때까지만 해도 단 하나의 길, 인문학과 책으로 이루어진 길만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거든요. 저는 이제 ‘내가 하루에 9시간 같이 얼굴을 마주 보는 사람들과는 영영 재미없겠구나-‘ 싶어서는 정말 슬퍼졌습니다.


정말 마라톤을 뛰다 발목이 나가 주저앉은 사람처럼 슬펐습니다. 하지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어요. “너 발목 삔 게 아냐. 잠깐  통증이 왔을 뿐이야. 뛸 수 있어.”라고요. 당시 저는 몰랐습니다. 제 안에도 흔히 말해 ‘메이저’한 재미가 있을 줄 말이에요. 그렇게 낙심하던 사이 저에게 누군가 건네었던 “00 이는 거기 있는 게 어색하지 않아.”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 말은 활동적인 사람들 사이에 그러니까 소위 말해 ‘인싸’ 기질 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제 모습을 보며 누군가 건넨 말이었어요.


재미의 씨앗


당시 저는 누가 봐도 재미가 없어 보였어요. (지금도 재미없어 보인다고 하실 수도 있지만요… 하하 ) 그러니까 정확히는 재미가 없다-고 생각될만한 사람이었죠. 철학을 좋아했고, 혼자 카페 가서 책 읽는 걸 좋아했고, 혼자 맛집을 돌아다녔고… 만나면 철학이야기나 사람에 대해 고민했던 이야기들을 했으니까요. 아시겠지만 철학 얼마나 노잼입니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어쩌고 저쩌고, 플라톤이 어쩌고 저쩌고, 이름도 외우기 어려운 키에르케고르, 들뢰즈 같은 사람들이 풀어놓지도 않은 한자어인 실존이니 기투니 하면 졸려요. 물론 저는 재밌어했지만요.


위에 서술했듯이 그리 또 건강하지 않은 정신건강도 한몫했습니다. 공황에 우울에 불안이라는 삼단콤보는 그리 유쾌하진 않은 특성들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가방에서 깨진 향수처럼 그 특징이 냄새처럼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얘는 재미없어-라는 표정이 보일 때마다 저는 눈치껏 자리를 떴습니다. 서로를 위해서요.


다행히 저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만나면 “생각 없이 웃기”가 목표인 서산에 사는 친구가 있는 한 편, 같이 토론을 하면서 재미를 느끼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스스로를 관찰하며 독특함, 특성, 행복을 발견하는 재미도 물론 느꼈습니다. 변명처럼 들리실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글을 읽으셨다면 아시겠지만… 철학과 여행과 자신에 대해 발견하는 재미에 진심인 편이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자기만의 재미가 있었고 그게 꼭 나쁜 재미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볼 때’ 저는 재미없는 사람이 맞았어요. 그리고 저 스스로도 어느샌가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죠. 하하… 하지만 사건은 입사하고 5일 정도가 지난, 정말 아무것도 모르던 때에서 시작 됐습니다.


교회 수련회(를 가장한 MT)가 5일 뒤에 잡혀 있었어요. 다행히 회사의 배려로 연차를 쓰고 방문했던 곳에서 했던 건 다름 아닌 ‘성격유형 TEST’. 성격유형에 진심 of진심인 저희 교회는 꽤 긴 시간을 투자해 스스로의 메타인지를 높이는 시간을 가졌죠. 성격 유형을 통해서요. 어떤 성격유형 테스트를 사용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확실한 건 ‘활동형’과 ‘의미지향형’ 그리고 다른 두 유형이 있었습니다.(거기에 ‘탐구형’과 또 다른 유형 하나가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 저는 사람도 어느 정도 좋아하고, 매 순간 의미를 찾는 진성 철학쟁이다 보니 당연히 의미지향이 제일 높으면서도, 사람들과 엄청 활발하게 놀지는 않고, 혼자서 이것저것 재미를 찾는 사람이니 활동이 제일 낮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림도 없는 판단이었죠. 채점 결과, 모든 예상을 제치고 ‘활동형’이 1등을 차지했습니다.


활동형. 청천벽력이었죠. 결과가 잘못된 줄 알았어요. 과감 좀 보태서 ‘내가 인싸라고?’ 이 생각부터 들었어요. 물론 이후 알게 된 사실은 활동형이 인싸라는 단어와는 또 다른 차원의 단어라는 걸 알게 됐지만 당시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아 물론 무너지는 하늘을 잘 수습했어요. 프로페셔널하게 티는 내지 않았죠. 하지만 마음에서는 혼돈과 이상함의 연속이었죠. 마치 신포도를 보는 여우처럼 ‘이건 잘못된 결과일 거야. 검사가 잘못됐을 거야-‘를 되뇌었습니다.


물론 그 결과를 받아들이기까지는 하루가 걸리지 않았습니다. 우선 ‘의미지향형’ 조에서 저를 보는 눈빛을 통해 1차 충격을 받아요. 각 조는 90cm 정도 되는 전지에 제주도 여행 계획을 짜고 발표하는 과정을 가졌어요. 그렇게 모든 조의 발표가 진행됐는데 충격적 이게도 저희 조에 쓰여있던 건 ‘패러글라이딩’, ‘수영’, ‘스쿠버다이빙’ 등이었어요. 그래요. 탐구와 관찰을 좋아하는 조에서는 눈빛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았어요. “도대체 이렇게 놀면 언제 쉬어요?”


저도 몰랐습니다. 언제 쉬는지요. 하지만 제가 포함된 활동형 조에게 쉼이란 더 재밌게 놀기 위한 추진력 같은 것이었어요. ‘이쯤 되면 힘드니까 2시간 정도 카페에서 잠깐 쉬고요’라는 말이 나왔던 것 만 생각해 봐도, 쉼이라는 건 거의 사치에 가까웠습니다. 맞습니다. 노는 게 중요했어요. 여행 계획 역시 놀다 못 죽은 뽀로로 6명이 짜는 기분이었어요.


해당 발표가 진행됐을 때 ‘의미지향형’에서 보냈던 ‘이 사람들 뭐지?’라는 당황하는 표정과 의문의 표정은 아무래도 잊을 수 없어요. 그 눈빛의 의미는 의미지향형 조의 발표에서 비로소 알게 됐어요. 그들은 ‘함께 대화하기 위해’ 카페를 가고, ‘함께 대화하기 위해’ 바다를 갔어요.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더 중요했던 그들에게 ‘무엇을 하냐’가 더 중요한, 아니 ‘아무튼 재밌냐’가 중요한 우리들이 이상하게 보일만 했어요.


저는 아직까지 수영을 잘못해 육지에 떨어진 펭귄처럼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어리둥절했죠. 하지만 성격유형을 확인한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축구할 사람들을 모집하고, 점심과 저녁 쉬는 시간만 되면 글러브를 가지고 캐치볼을 하는 스스로를 인식하기 시작하자 ‘아…!’ 싶었습니다. 비록 혼자 여행 가고, 혼자 마이너 한 취미를 가지고 있어 스스로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본인 스스로는 활동을 통한 재미를 추구하고 있었던 거죠. 그때부터 자기 자신을 ‘재미’라는 키워드로 보는 재미의 씨앗이 심어졌습니다. 이제 반대로 의문이 생기기 생각합니다. ‘정말로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재미를 싫어하나? 나와 정 반대에 있는 사람들의 재미를 정말로 싫어할까?’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제주행 비행기를 끊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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