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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ritainer 도은 Sep 04. 2024

지친 직장인에서 평화로운 삶으로: 내가 만난 지혜요가

갸나요가와 박티요가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직장 생활하면서 참 지치고 힘들 때가 많았다.

죽기살기로 해야 뒤로 물러나지 않고 현재자리에 버틸 수 있을 수 있을 듯한 느낌.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저 멀리인데, 언제 갈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마치 물고기가 물밖으로 내던저져 태양아래 아스팔트 위애서 위아래로 팔딱팔딱 뛰며 저항하다

힘은 떨어지고, 눈만 꿈뻑꿈뻑하고 서서히 말라가다가 죽어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매일 숨쉬기도 어려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내가 찾은 위안이 바로 요가였다. 

요가 매트를 펼치고, 몸을 늘리고 꼬을 때마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걱정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만큼은 진짜 평화롭고 행복했다.


그래서 "이렇게 요가만 하면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모든 걸 내려놓고 인도로 가서 요가를 제대로 배워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좋은 선생님만 있다면, 요가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데 문제는...

요가를 끝내고 나면 다시 괴로운 현실로 돌아온다는 거였다. 

요가 할 땐 그렇게 좋았는데, 그 행복감이 오래 가지 않았다. 

일상은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스트레스는 계속 쌓여만 갔다. 


"더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생계를 위한 대안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일단 회사를 관두고 숨쉴 수 있는 곳으로 찾아가기 시작했다.

남들은 출산휴직도 가능하고 종신고용이 보장되는 회사를 왜 그만두냐고..

특히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지만, 일단 나부터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감행했다. 사직. 


그렇고 나를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는 곳으로 보이는 세미나, 워크숍을 찾아 전국으로 돌아다녔고,

그렇게  내 인생이란 흐름에서 만나게 된 요가선생님은 참 재미있게도 

몸을 늘리고 꼬는 하타 요가가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박티 요가, 그리고 지혜를 알려주는 갸나 요가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70대의 할아버지였기 때문에, 예쁘고 날씬한 여자선생님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분이셨다.

그리고 인도까지 갈 필요도 없이, 내가 가장 좋아하던 서울의 광화문의 한 사무실에서 뵐 수 있었다.

더욱이, 내가 다니던 회사의 고문이셨기 때문에, 일을 구하자마자 덕업일치가 되었다.  


지혜의 요가를 알려주는 선생님은 

몸이 유연한 것보다, 생각이 유연할 것을 강조하셨다.

그렇게 나의 마음이 감각적 현실세상에서, 영적인 세상으로 닿게 하도록 많은 다양한 종교의 경전의 말씀과 실습을 곁들이셨다. 

어떤 사람은 실습으로 자신이 느낀 것 만으로도 확신을 가졌지만,

내가 학구적이라 책을 좋아하는 것도 있었고, 근거가 없으면 믿지 않으려 하는 나의 성향도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숙한 육체를 기반으로 한 생각과 다르게,

영을 기반으로 하는 생각은 처음엔 낯설고 어려워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내 눈앞에 보이는 높은 산을 넘는 것 보다, 내 안의 산을 넘는것이 더 어렵다고 하지 않았던가?

스스로 우뚝 세워 놓은 내 안의 산, 예를들면


"배신한 자, 뒤에서 헐뜯는 자는 상종을 말아야해.

나에게 화를 내는 자는 나를 무시하는거야. 널 무시하는 사람과 상종을 말아야해.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어야 해.

니가 하고자 하는 분야에서는 최고가 되어야 해.

건강을 위해 건강한 음식을 건강하게 조리해서 먹어야 해.

교통질서를 위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내가 있었던 자리는, 내가 있기 전보다 더 깨끗하게 만들어 두고 자리를 비워야 해."


과 같은 생각들이 나도 모르게 우뚝 서 있었다.

이런 생각들은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 만큼 크고 높은 산이었다. 

그리고 그걸 넘는 것이 나를 얼마나 편안하게 하는 것인지는, 넘어보고 나서야 알았다.

그리고 그러한 산을 넘는것이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다.


그러다보니 지혜의 요가에 대한 신뢰가 생겼다.

그렇게 나는 선생님의 안내에 따라 내 안의 산을 넘기 시작했다.

즐거운 날이 훨씬 많았지만, 어떤 날은 힘들기도 했다.

그렇게 내 마음의 산을 하나씩 넘으면서, 진정한 평화를 맛보게 되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즐거웠다.


당시 30여개국에서 여행을 했었는데, 세상의 그 어떤 곳을 가도 이처럼 신선한 곳은 없었고,

세상의 그 어떤 일을 해도 이처럼 즐겁고 통쾌하면서도 마음이 충만해 지는 것은 없었다.

남들이 보면 젊은 사람이 낮에 직장에도 가지 않고 집에 있는 반백수 같았겠지만,

우리는 우주를 내려다 보며 모든 우주와 하나임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갸나요가를 통해 내 마음의 지혜를 넓히고,  

박티요가를 통해 사랑을 실천하니 내 마음이 넓어져 내 고민이 해결되었다.

내 고민이 해결되니, 가족의 고민이 해결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연락이 끊어졌던 친구, 선후배, 다른 사람들의 고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고민이 해결되니 자연스럽게 더 많은 사람들의 고민을 해결해 주고,

그 가볍고 즐거운 마음을 같이 느끼고 싶었다.

그때 더 행복하니까.


가끔 스스로 이런 고민이 들기도 한다.

"니가 이런 얘기를 하는게 다른 사람에게 이해가 될 것 같애? 너만 이상한 소리하는 사람 취급 받을거야."

가끔 그런 사람을 만나기도 하지만, 감사하게도 더 많은 사람이 먼저 나에게

"선생님 사랑해요"라고 해주신다.

"선생님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아요. 너무 시원해요"라고 해주신다.


그리고 내가 이공부를 워낙 의심했기에,

어떤 의심의 질문 앞에서도 여여하게, 그들의 관점에 맞추어 설명할 수 있어 감사하다.


"학교만 가면 수업방해를 놓아서 조퇴하던 애가, 

지금은 학교수업 마치고 와서 집에서 숙제 해놓고 날 기다리고 있어"

라고 얘기를 듣는다던지,


"예전같았으면 크게 싸웠지, 그 직원이랑! 그런데 내가 먼저 아주 부드럽게 얘기하게 되더라고. 

상대가 불편할까봐 농담까지 섞어서. 그 사람의 입장이 이해되니까!"

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참으로 기쁘고, 행복해다.


이 여정 속에서 만난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되고

오늘도 누군가에게 그 평화를 전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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