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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녀미 Jan 10. 2020

남편이 없는 캠핑

어쩌다 모인 여자 셋이 데스밸리로 캠핑을 떠났다


@womensbasecamp
삶을 돌보는 밀레니얼 여성들의 베이스캠프
2020년 1월 3-5일 / Furnace Creek Campground, Death val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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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의도치 않게 빠졌거나 혹처럼 더해졌는지
도착해서 세 여자가 각자의 짐을 풀 때까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지난 2년간 열 번 남짓의 캠핑을 하는 동안 늘 남편과 나의 역할 분담이 철저했다. 남편은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가는 길에 주유하고 식사할 곳을 찾는다. 떠나기 전날에는 차를 점검하고 기름을 가득 채우고 카메라와 고프로 배터리를 충전한다. 나는 간식과 식사 메뉴를 정하고 장을 보고 캠핑 장비와 기타 필요한 물품들에 대한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짐을 챙긴다.

 캠핑을 떠나는 날 내가 거실에 모아둔 짐을 남편이 차로 옮기고 트렁크에 테트리스를 하는 동안 나는 우리 집 고양이 보리구름을 위한 화장실의 모래, 사료와 물을 가득 채워둔다. 남편이 다섯 시간을 혼자 운전하는 동안 나는 옆에서 말이나 조금 걸다가 그 마저도 한두 시간 하고는 잠에 빠진다.

 캠프 사이트를 찾고 무거운 짐들을 남편이 내려주고 나면 그때부터는 내가 집중할 차례. 차를 어느 방향으로 대야 하는지, 텐트와 타프, 쿨러의 위치를 정하고 세팅한다. 남편은 내가 오르기에 너무 높은 나무에 올라 타프 줄을 감아주거나, 내가 정한 위치에 팩을 박거나 줄을 잡아준다. 그러고 나서 내가 자잘한 짐을 정리하며 우리 캠프를 꾸밀 동안 남편은 사이트 주위를 둘러보고 사진을 찍으러 다니거나 재미있는 것을 보고 돌아와 나에게 이야기를 해준다. 네가 이걸 해줘 나는 이걸 할게, 하는 일 없이 자연스레 일이 나뉘었고 자신의 일을 하면 된다.


 그런데 이번 캠핑에는 남편이 없다. 

 남편이 없는데도 짐은 너무 많다. 대부분의 캠핑에서 뭘 챙겨야 하는지 머릿속에 환하게 그려지던 나였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다. 캠핑을 함께 할 다른 두 명이 무엇을 챙기고 빠트릴지 모르니 온갖 종류의 건전지나 클렌징 티슈, 손톱깎이까지 바리바리 챙기고 본다. 남편과 둘이 쓰는 짐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가 의도치 않게 빠졌거나 혹처럼 더해졌는지 도착해서 세 여자가 각자의 짐을 풀 때까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이번 캠핑 장소인 데스밸리는 전에 남편과 두 번이나 와본 지역이긴 해도 늘 별생각 없이 따라다녔기 때문에 이 곳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정말 없다. 캠프그라운드도 남편이 정해주었지만 데스벨리에 들어서기 한 시간 전부터 이미 남편과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캠핑을 계획할 무렵에는 '남편이 없는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준비를 해 보겠다'라고 마음을 먹었지만 결국 나는 내 습관대로 별다른 준비 없이 구글 맵스의 오프라인 지도만 다운로드한 채로 출발하게 되었다. 

밤 열한 시, 차도 사람도 없는 도로에 폰 시그널도 안 잡히는 채로 데스밸리로 향하는 세 여자. 왠지 공포영화의 도입부 같은 느낌이 들어 슬쩍 말을 꺼내 보았다가 차 안에 "꺄- 무서워, 그런 소리 하지 마-" 하며 웃음 섞인 비명이 되돌아왔다.

다른 방식으로 짐을 싸고 다른 방식으로 요리하고,
다른 방식으로 휴식하는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경험과 생각을 나누며 캠프파이어 앞에서의 시간이 흐른다. 

"There is a love of wild nature in everybody" 

 자정이 다 되어서야 캠프그라운드에 도착해 보니 나름 준비를 한다고 해 왔지만 제대로 분담이 되지 않아 랜턴은 다섯 개나 가져왔는데 키친타월이 하나도 없는 상황인걸 도착해서야 알게 되었다. 그런 것 마저도 재미있어서 속닥거리며 요란을 떤다. 모닥불 앞에서 발을 꼼지락 거리며 커다란 캠핑용 머그에 와인을 마시며 자신이 겪어온 캠핑들, 하이킹들에 대해 이야기 나눈다. 저녁까지 일을 하고 다섯 시간을 운전해 와서 어둠 속에서 텐트를 치고 의자를 펴고 불을 피우고 이야기 나누는데도 다들 피곤한 기색이 없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짐을 싸고 다른 방식으로 요리하고 다른 방식으로 휴식하는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경험과 생각을 나누며 2020년, 첫 번째 캠핑의 밤이 흐른다. 


 피곤한 줄은 몰랐어도 피곤했을 수밖에 없었을 지난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 아침잠에서 깬다. 어둠 속에서 찾아와 보지 못했던 주변 풍경을 둘러보고 커피 물을 올리고 스트레칭한다. 커피를 한잔 마시고 있으니 다른 두 명도 일어나 지난밤의 안부를 묻는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살짝 시간이 빈 틈을 타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요가를 하고 사진을 찍고 해먹을 건다. 이른 오전의 시간이 여유롭게 흘러간다.


 둘째 날의 일정으로 하이킹을 계획하긴 했지만 트레일을 알아보지도 않고 왔으니 비지터 센터에 방문해 코스를 추천받는다. 일에 열정과 의욕이 넘치는 아저씨에게 추천받은 코스 들 중 가까운 편인 모자이크 캐년으로 간다. 남편과 함께 하는 캠핑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키는 대로 정처 없이 걷게 되는 일은 자주 있어도 관광객으로 가득한 트레일을 걷기로 하는 일은 절대 없었으니 이 또한 설레는 일이다. 


 걷다 보니 더워졌다가 다시 그늘에서 추워진다. 목이 마르다. 바위를 넘는 일이 가파르다. 만약 남편과 함께였다면 남편이 내가 벗은 옷을 들어주었다가, 그늘에선 날 위해 챙겨 온 여분의 옷까지 입혀주었다가, 물을 꺼내 주었다가, 바위에선 손을 잡아주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내가 필요한 것은 무조건 내가 챙기고 들어야 한다. 남편의 부재로부터 오는 낯설고 신선한 기분을 느끼며 걷는 동안 내 뒤에선 두 여자가 마치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처럼 워킹하며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다. 나에겐 너무나 생소한 광경이며 무척이나 흥미롭다. 


 우리 사이트로 돌아와 음악을 틀렸는데 핸드폰에 틀 만한 음악이 없다. 집에서는 유튜브로 음악을 듣고 차에서는 남편의 폰으로, 캠핑을 와서도 주로 남편이 음악 선곡을 맡으니 벌어지는 일이다. 그나마 폰에 있는 음악 2000여 곡도 7년 전쯤 남편으로부터 물려받은(?) 곡 들이다. 나와 다르게 여러 부분에 대해 부지런한 남편은 그 이후로도 많은 음악을 정리하고 추가했지만 나는 그 곡들과 플레이리스트를 마치 고대의 유물처럼 지켜내고 있다. 집에 돌아가면 혼자만의 시간을 위한 나만의 선곡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낮에 각자의 시간을 보내다
밤에 함께 움직이는 남편과의 캠핑과는 달리,
이번엔 낮에 함께 걷고 떠들다
밤이 되자 혼자만의 시간이 펼쳐진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우리 텐트 역시 다른 텐트처럼 밤 아홉 시가 되기도 전에 불이 꺼진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는 남편과의 캠핑과는 많이 다르다. 주로 열두 시가 넘어 마지막 끼니를 먹고 밤새 관측을 하다 (우리 부부의 공통적인 취미이자 서로를 만나게 된 계기가 천체관측이다.) 새벽 다섯 시쯤에야 양치를 하고 잠자리에 드는 남편과의 캠핑. 이번에는 일곱 시가 되기도 전에 저녁을 먹고 캠프파이어도 아홉 시쯤에 끝낸 뒤 바로 양치를 하고 테이블을 정리한다. 주로 낮에 각자의 시간을 보내다 밤에 공동의 작업/활동을 하는 남편과의 캠핑과는 다르게 이번엔 낮에 함께 걷고 떠들다 밤이 되자 혼자만의 시간이 펼쳐진다. 렌턴을 걸어둔 폴의 키를 잔뜩 낮추고 옆에는 책과 스케치북, 맥북을 가져다 둔다. 그리고 물을 끓여 넣은 파쉬 보온백을 침낭 안에 넣으면 완벽한 세팅. 따끈하게 데워진 침낭 안에 다리를 넣고 책을 읽는 동안 서서히 달이 진다. 동쪽의 하늘은 여전히 광해로 밝지만 하늘에는 어느새 구름이 걷혔는지 별이 제법 총총하다. 


 모든 텐트의 불이 꺼지고 깊은 밤만 남은 이 곳에서, 아직도 초저녁 분위기일 나와 남편의 집을 그린다. 익숙한 나의 남편이 아닌 다른 어떤 여자들과 함께하는 캠핑의 밤. 집이 너무나 그리운 것과는 별개로 이 곳에서의 시간 역시 너무나 빠르다. 남편이 없는 캠핑. 남편이 없는 '첫' 캠핑. 낯설고 신선한 이런 종류의 캠핑을 자주 오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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