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기 전에 다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라며
모두가 떠나고 대피소 직원이 취사장을 정리할 때가 되어서야 나는 가방을 챙기고 신발을 신었다. 그런 뒤에는 한참을 데크에 앉아 있었다. 새벽 다섯 시 반에 벽소령에서 출발했다는 남자와 몇 마디를 나눈 뒤에도 그의 눈길을 피해 반대편 계단에 머물렀다. 뭘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얼마 만에 온 지리산인데, 아직 한참이나 더 걸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곧바로 하산하기는 아쉬웠다. 하지만 다시 세석을 들렀다 거림으로 내려가기에도 차편이 너무 애매했다. 이미 제석봉에서 내려오던 순간부터 묘하게 감정적으로 다운된 것 역시 문제였다. 오전 열 시가 넘어서야 백무동 방향으로 하산하기로 결정했다.
신발 끈을 제대로 묶고 스틱 길이를 조절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세석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뒤로하고, 중산리로 내려가는 길과 천왕봉으로 오로는 길 앞에서 몸을 돌려 백무동 방향 계단으로 오르는데 서러움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계단 하나하나를 오르며 걸음을 내딛는데 그제와 어제의 아름다웠던 순간들, 음정마을에서 시작된 기나긴 오르막부터 벽소령 산장의 푸른 하늘, 세석 전의 꽃 하늘길과 촛대봉, 지난 저녁과 아침 제석봉의 긴 고사목 그림자까지. 이 모든 걸 두고 혼자 떠나는 게 서러웠고, 사람들이 사납(다고 느껴지)고 나 역시도 사나워지는(것 같은) 서울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다시 엘에이로, 아니 가능하다면 다시 지리산 어디론가 얼른 돌아가고 싶었다. 지리산에 살던 10년 전 그때로. 지리산을 떠나 일산으로 이사하던 열아홉 살 늦가을의 어느 날 저녁이 떠올랐다. 초코집 가로등 기둥 아래 자갈 다섯 개에 매직으로 내 이름을 써 두고 서울로 왔던 그 날.
한동안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고 걸었다. 발걸음 걸음마다 이어지는 생각도 끊임이 없어서 울다 말다 하며 한참을 걸었다. 가끔 아래에서 올라오는 사람들과 마주쳤지만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인사를 했다. 혼자 지리산을 걸으며 울고 있는 사람을 보면 과연 어떤 서사를 떠올리게 될지 궁금했다.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아무와도 함께 걷고 싶지 않았다. 그냥 내가 나의 지리산에서 혼자 울고 혼자 걷도록 내버려 두었으면 했다.
지리산의 돌은 한결같고 풀과 꽃들은 매일매일이 다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늘 지리산일 뿐이었다. 대피소는 전과 비교해 특유의 산장 분위기가 적어지고 편리함이 늘었지만 내가 걷던 길들은 거의,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라 앞으로도 한동안 이 모습 그대로 일 것이었다. 지리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니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걸까. 지리산에게 버림을 받은 것도, 누군가에게 등 떠밀려 내려가는 것도 아니었다. 언제든 돌아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내가 원한다면 주말을 중산리나 거림 어딘가에서 보내고 다시 산에 오를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자꾸 눈물이 났다. 하산을 시작한 지 이십 분쯤 지나 겉 옷을 벗기 위해 잠시 가방을 풀어둔 곳에서 유난히 많았던 쓰레기와 담배꽁초들을 한참 주우며 지리산의 신에게 기도했다. 그리 멀지 않은 시간 내에 나를 다시 이 산으로 이끌어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