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은성 Apr 29. 2021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어릴 적 살았던 우리 집은 부엌에 들어가려면 신발을 신어야 했다. 시멘트 바닥에 부뚜막과 연탄아궁이가 있었던 그 시절 다세대 주택의 흔한 부엌이었다. 어느 날 부엌에 들어가려고 문을 드르륵 열었는데 그 순간 하수구에 머리를 내민 생쥐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이후부터 생쥐가 너무 싫었다. 싫은데 너무 빨리 뛰어다니니 무서워졌고 지금까지 쭉 무서워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줏대 없게도 미키마우스나 제리(톰과 제리) 같은 쥐 캐릭터들은 또 그렇게 귀여워한다. 이 귀여운 쥐들은 무섭지도 않고 징그럽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는 것도 참 당황스럽다. 그중에서도 각별히 사랑하는 특별한 쥐 한 마리가 있는데, 빛과 색과 이야기를 모으는 일을 하는 그는 ’ 너 시인이구나 ‘라는 친구들의 감탄에 ’ 나도 알고 있어 ‘라고 수줍게 말하는 세상  가장 매력적인 생쥐이다.      


이렇게 뜨겁게 사랑하는 쥐는 레오 리오니 작가의 <프레드릭>이다. 다른 쥐들은 추운 겨울을 대비해 열심히 일해서 양식을 모으는데 프레드릭은 친구들이 하는 일을 함께 하지 않는다. 친구들이 너는 무엇을 하느냐고 물으면 자신은 겨울의 추위를 대비해 햇살을 모으고, 겨울의 잿빛 풍경에 대비해 색을 모으며 겨울의 긴 밤을 채워줄 이야기를 모으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자신이 하는 일의 가치를 알고 있는 이 당찬 쥐가 너무나 사랑스럽다. 그리고 그런 프레드릭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고 존중해주는 친구들이 또 너무 감격스럽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개미와 베짱이를 통해 익히 알고 있고 우리의 삶 속에서도 경험하고 있다.     


’ 틀린 그림 찾기‘라는 놀이가 있다. 전체적으로 같아 보이는 두 개 이상의 그림을 제시해 주고 두 그림에서 다른 부분을 찾는 놀이이다. 이 놀이는 다른 부분을 찾는 것이 목적이니 ’다른 그림 찾기’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인데 ‘틀린’이라는 표현을 오래도록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이 흔한 예를 비롯해서 ‘다르다’를 써야 할 문장에 ‘틀리다 ‘를 오용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참 오묘하게도 ‘다르다’를 대신해서 하필 ‘틀리다’를 썼다는 것은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치부하겠다는 무의식적인 선언이 함의된 실수 아닐까. 그만큼 우리는 다른 것에 대한 은근한 민감함을 가지고 있고 언제든지 거부감을 드러낼 수 있는 자세로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동질감, 참 좋아한다. 내가 가진 것들과 교집합이 많은 집단 속에 있으면 이야기할 것들도 풍부하고 비슷한 상식선에서 교류가 이루어져서 마음이 편안하다. 동질감 속에서 안정을 느끼는 것은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보면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결과다. 생명과 삶의 터전을 지키고 종족의 번영을 이루기 위해서는 나와 다른 것들로부터 우리를 지키려는 안간힘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유구한 역사들이 인간 유전자 깊숙한 곳에 남아 본능적으로 닮은 것을 추구하고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불안을 느끼고 배척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리라.     


동질감을 느끼고 그 속에서 안정을 추구하는 것에는 어떤 문제도 잘못도 없다. 하지만 이 동질감이 구분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 위험하다. 니 편, 내 편을 갈라서 내 편은 내 울타리 안에 두고 니 편은 울타리 밖으로 쫓아내겠다는 은밀한 속내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 구분‘ 뒤에는 내 것이 옳고 나와 다른 너는 틀렸으니 존중  가치가 없다는, 함부로 해도 된다는 폭력이 뒤따른다. 우리 사회에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혐오의 분위기, 이치도 합리도 통하지 않는 무례한 폭언과 폭력이 난무하는 것이 모두 경계선을 그으면서 시작되었다.


사실 이 경계선이 얼마나 고무줄 경계선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동네에서 편을 갈라 니 편 내 편 매일 싸우다가도 다른 동네 아이가 우리 동네 아이를 괴롭히면 니 편 내 편 없이 똘똘 뭉쳐서 쳐들어가는 것이 우리가 아니었던가. 아무런 경계도 만들지 않으면 세계가 참 평화롭겠지만 그것은 나보다 더 용기 있는 사람에게 맡겨두더라도 나의 울타리를 한 뼘씩 늘려가는 것은 시도해 볼 수 있다. 한 뼘씩 늘려가다 보면 경계선이 있기야 하겠지만 내가 선 자리에선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지게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내 울타리 안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나와 달라서 재미있다고 말하게 되지 않을까.   

  

언뜻 잘하고 있다고, 모든 존재를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었다. 나와 다른 타인을 비방하거나 폄훼하거나 차별하지 않았으니 존중한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골똘히 생각해보니 존중했던 것이 아니라 무시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의 울타리에 넣지 않을 거니까 어차피 상관없는 사람이니 존중한다는 말로 선을 그어버린 것이지 진심 어린 존중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무시와 존중의 차이가 무엇일까로 생각이 이어지자 대답은 명확했다.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사랑이 없는  공허한 존중은 무시의 예의 바른 척에 불과하다. 사랑을 담아 존중하는 사람이 되던가 존중하고 있지 않으면서 존중하는 척하지 말던가 할 일이다.    

  

글을 쓰는 일은 끊임없이 나를 성찰하게 만든다. 자꾸 반성할 일이 많아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스무 살, 그 밤의 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