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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성 May 27. 2021

마음 한 장 씻어 말린 날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수다- 눈물 편

하늘이 새파랗게 푸르고 먼지 한 점 없이 맑았던 어느 날이었다. 흠뻑 젖은 마음 한 페이지를 꺼내어 깨끗한 물에 헹구고 물기를 꼭 짜서 산들바람이 부딪히는 빨랫줄에 널어놓았다. 바싹 말라 새 것 같이 깨끗해진 마음 한 장을  해질녘에 걷어서 다시 삼켰던 행복한 하루가 있었다.     


그날, 내 마음 날씨는 맑음이었고 비가 올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음악이 스며들자 찰랑찰랑 물이 고이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커다란 호수가 생겨났다. 그리고는 호수에 빗방울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며 파문을 일으켰고 점점 비가 거세지고 바람이 휘몰아쳐서 고요하던 호수를 발칵 뒤집어 놓는 격랑이 일었다. 그 순간 마치 호수의 물이 넘쳐흘러 범람하듯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음악이 몇 번 반복되는 동안 쉴 새 없이 흘렀는데 그냥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평소에도 눈물 인심이 후한 편이라 이 뜬금없는 눈물이 당황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자주 만나는 그것들과는 결이 다르다는 묘한 느낌이 있었다.     


실컷 울고 난 후 요동치던 감정이 서서히 가라앉자 음악을 껐다. 청량한 바람이 쏴 하고 마음을 훑고 지나간다. 비바람이 휩쓸고 간 호수는 밑바닥에 깔려있던 모래와 돌들이 발칵 뒤집혀 새롭게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태풍이 몰아치기 전보다 더 맑고 깨끗한 모습으로 잔잔함을 되찾는다. 후련하면서도 맑게 갠 마음으로 ’이 눈물의 근원은 무엇일까?‘ 하고 우물 바닥 들여다보듯이 마음속 깊은 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슬픔이나 아픔이나 감동 같은 단순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다소 복잡한 감정들이 잭슨 폴락의 흩뿌려진 추상화처럼 뒤엉켜 있었다.     

  

나는 어른이 된 지 오래되었지만 스스로가 진짜 어른인지를 아직 잘 모르겠다. 모르지만 어른인 척 살아가고는 있다. 해야 할 말과 하지 않아야 할 말을 구분해서 하고, 해도 될 행동과 해선 안 되는 행동을 분별할 줄 안다. 하지만 여전히 미성숙하고 나약하여 못하는 것과 하기 싫은 것이 너무나 많고 앞으로도 잘 하게 될 것보다 잘 못하게 될 것들이 더 많아질 것이 분명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어른이라고 뭔가 완성된 인간이 된 양 행세하는 것이 버겁고 숨이 찰 때가 있다. 잘 모르겠는데 아는 척 할 때도 있고 부끄러운데 하나도 안 부끄러운 척 할 때도 있다. 마음 졸이고 있으면서도 태연한 척 할 때도 있고 상처 받아서 피를 흘려도 아무렇지 않은 척 할 때가 있다.  

     

괜찮은 척했으니 괜찮은 줄 알았던 외면받은 감정의 파편들이 사라지지 않고 마음 한구석 어딘 가에 쌓여 가고 있었던 것 같다. 돌보지 못했던 감정들이 큰 소요를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그렇게 웅크리고 있었는지도 모른 채 지내왔는데 무심코 흘러든 1분 13초의 짧은 연주곡이 그것들을 끄집어낸 것이다. 큰 소리로 존재를 드러내지도 못하고 쭈뼛쭈뼛하는 모습으로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라서 그냥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그 초라함이 ’진짜 나‘인 것 같다. 어른인 척하는 ’꾸며진 나’가 아니라 진짜의 나인 것 같아서 안쓰럽고 애처로운 마음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감정이 단조로운 삶을 살고 있었구나 싶다. 재밌으면 웃고, 힘들면 짜증 내고, 슬프면 는 단편적인 감정들만 반복해서 꺼내 쓰면서 대체로는 큰 감정의 동요 없는 무던한 삶에 익숙해져 있었다. 한때는 분명 낙엽 굴러가는 것만 봐도 까르르 웃음이 나는 시절도 있었는데 말이다. 꺼내 쓰지 않았다고 해서 그때의 까르르 했던 감정들이 사라졌던 것은 아니었던가 보다. 생각보다 더 다채롭고 오묘한 감정들이 여전히 마음속 어딘가에서 자신의 순번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이 다양한 감정들을 골고루 꺼내서 젖은 것은 햇볕에 말려주고 구겨진 것은 탈탈 털어 펴주기도 하고 신난 것은 바람에 실컷 나부끼며 놀게 해 주어야겠다. 다음번엔 어딘가 간지럽기도 하고 말랑말랑 한 것 같기도 한 그런 기분들을 한 번 꺼내 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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