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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 Feb 16. 2021

몰랐는데,
나는 힘들 때 걸음이 더 빨라지더라

올레길 18코스 어딘가에서, 힘들 때 오히려 쉬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다.


올레길을 걸으며 무조건 길 위에 있어야 하는 시간,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바로 전날 숙소의 체크아웃 시간과 오늘 갈 숙소의 체크인 시간, 그 사이의 시간이다. 만약 조금 일찍 체크아웃을 해야 하거나 체크인 시간이 늦은 숙소의 경우라면 길 위에 있어야 하는 시간은 더 길어진다.


사실 길어봤자 평균 5시간이기에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순례길을 걸을 때도 보통 길에서 5-6시간은 있었고, 길면 7시간 이상 길 위에 있던 적도 많았으니까. 

또한 당시에도 평균 25km 정도는 걸었기에 이번 올레길에서 계획한 하루에 약 20km 내외의 거리와 5시간이라는 시간은 쉬엄쉬엄 걸으며 제주의 풍경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적당한 계획"이라 생각했다.


근데 나도 몰랐지, 내가 힘들어지면 걸음이 빨라지는 줄.


그리고 그 길에서는 함께하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나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도..






올레길 첫날, 비행기를 타고 11시쯤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짐을 찾고 제주 지킴이를 빌리고 나니 12시.

오늘의 계획은 약 20km, 숙소 체크인 시간은 4시. 체크인 시간 넘어서 도착하겠네, 바로 저녁거리 사들고 들어가야겠다! 고 생각하며 길을 나섰다.


오랜만에 길 위에서 배낭을 메고 걸으니 너무 행복했다. 바람, 햇살, 냄새, 적당한 뻐근함까지. 모두 다.

끝도 없던 사라봉 정상을 향한 계단

철썩이는 파도소리, 그 위를 쉼 없이 오가는 비행기, 날이 좋아 너무 아름다웠던 용연다리, 길 가다 사 먹은 예쁜 도시락, 처음 만난 간세, 그리고 사라봉.. 

(근데 사라봉부터 문제였던 것 같다ㅋㅋㅋㅋ) 오랜만의 걷기에 행복했던 기분은 사라봉을 걸어 올라가면서부터 조금씩 사라졌다.

끝이 없던 사라봉의 계단은 그동안 저질 체력이 된 내 체력 때문인지, 10kg가 넘는 배낭의 무게 탓인지, 아니면 너무 일찍 만난 계단 탓인지(사실 계단을 진짜 힘들어한다. 특히 올라가는 계단..) 나의 발걸음을 계속 멈추게 했다.

조금 오르다 쉬고, 조금 오르다 쉬고. 눈 앞에 보이는 곳까지 걷고 쉬자, 몇 계단만 더 올라가자. 계속 나를 다독이며 계단을 올랐다. 마스크를 써서 인지 숨은 더 턱 끝까지 올라왔다.


그렇게 나는 나를 채찍질하며 사라봉에 올랐다.

역시 오랜만에 걸으니 힘들구나, 사라봉에 올라 숨을 골랐다. 힘들었던 만큼 사라봉의 정상은 아름다웠다.

사라봉 정상에는 산책을 나온 주민들이 많았고, 여느 동네 뒷동산처럼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거나 가벼운 운동 중이었다. 벤치에 가만히 앉아 소소한 풍경을 바라보다가 이내 발걸음을 재촉했다. 숙소에 일찍 도착해야 할 필요도 없는데.. 계단을 올라오며 중간중간 시간을 지체했다는 생각에 아름다운 사라봉의 풍경을 뒤로하고, 또다시 길을 나섰다.


사라봉을 내려와 인적 드문 마을로 들어섰다. 행여나 파란색 화살표를 잃어버릴라 골목을 기웃기웃 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아뿔싸, 사라봉과 별도봉을 내려와 만난 새파란 바닷길에 사진을 찍고 핸드폰을 보며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파란색 화살표가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으로 지도 어플을 켰다. 마침 얼마나 남았는지, 길은 맞게 가고 있는지 필요했으니까.

근데 지도를 보고 흠칫 놀랐다. 숙소까지 1.5km, 30분도 남지 않은 것이다. 아직 3시인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뭐가 잘못된 거지? 아니, 잘못된 건 아니지만... 어쩌다 이렇게 시간이 많이 남은 거지? 


곰곰이 시간을 계산해보니, 나는 사라봉에서 체력을 많이 뺏기기는 했지만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더라.

거리와 비례해서도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이 아니었는데. 중간중간 내가 많이 쉬었다는 생각에, 시간을 지체했다는 생각에 나를 채찍질한 거였다.

올레길 첫날인 오늘의 나는, 갑자기 맞닥뜨린 계단에 체력을 많이 뺏겨 두려워졌던 거다.


그래서 나는..

정상이 어디인지 몰랐기에 계단 중턱에서 쉬지 않았다, 중간에 쉬면 일어나기 힘들어질 것 같았기에.

남은 거리가 많지는 않았지만 이미 체력이 떨어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랐기에 충분히 쉬지 않았다, 차라리 빨리 도착해서 쉬는 게 나에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잠깐 쉬는 시간에도 5분만 지나면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무뎌진 발을 조몰락거리다 이내 다시 신발을 신었다, 5분 정도면 뻐근해진 내 발을 마사지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평지를 걷게 되면 이내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평지에서라도 속도를 내야 했으니까. 왜 속도를 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나는 숙소를 1km 앞둔 외딴 공터 의자에 앉아 30분가량 시간을 때웠다.


쉴 수 있는 벤치도 없는 공터에 가만히 앉아있으니 웃음이 났다.

차라리 아까 계단 올라갈 때 쉴 걸, 아니면 사라봉에 올라서 아름다웠던 풍경을 보고 넋이라도 좀 놓을걸, 아니면 아까 점심이라도 느긋하게 먹을걸... 결국 그렇게 재촉하더니 엄한 곳에 앉아 30분을 억지로 보내고 있구나.. 



후회를 곱씹다 생각해보니 나는 어떤 것이든 중간에 쉬지 못하고 나중에 후회하던 사람이었더라.


나는 늘 어떤 일이든 최대한 빨리, 효율적으로 해내고자 했다. 그렇기에 철저하게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이 어그러지면 나를 자책하고 재촉했다. 이럴 시간이 없어, 얼른 힘을 내, 쉬는 건 나중에 끝난 뒤에 쉬면 돼. 지금은 무조건 달려야 할 시간이야. 사실 시간을 버린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빨리 끝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모든 게 끝난 뒤에도 나는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때 왜 그랬을까, 곱씹으며 자책하는 시간으로 잠깐 쉬는 시간을 채워 넣으며 결국 그다음 스테이지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럴 시간에 한 계단 더 올라야 했으니까.

힘들어도, 쓰러질 것 같아도. 다들 그렇게 사는 거니까, 나만 힘든 게 아니니까 괜찮다며 다독이다가 아팠던 건데.. 그렇게 힘들어져 모든 걸 놓고 싶어 졌던 건데...

재촉하고 자책하고 반성하고, 그게 힘들어서 온 길이었는데.. 쉬려고 온 이 길에서도 나는 쉬지 못하고 계속 나를 혹사했구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아니, 그래도 하루가 다 지나버렸지만 첫날에, 이 엄한 곳에서, 숙소를 1km도 남기지 않은 이 바람 부는 길바닥에서 알아차린 것이 다행인 걸까.



그래서 이다음 날부터는 의도적으로 더 쉬려고 노력했다.

한 시간에 한 번은 어디든 철퍼덕 앉아 쉬려고 노력했다. 한번 쉴 때는 적어도 15-20분은 쉬려고 노력했다. 아, 이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싶어도 무조건 쉬었다. 쉬고자 하던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일어나고 싶어 지면 아예 누워버렸다. 눈을 감아버렸다.

나는 쉬는 시간이 필요하니까. 

그러다 보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나의 몸과 마음의 상태가 느껴졌다. 이 길이 더 와 닿았다.


쉬는 것도 익숙해졌다.

이러려고 내가 왔구나, 내가 쉬려고 이 길에 왔구나,

내가 쉬어도 괜찮구나.


쉬어도 괜찮다, 쉬어도 괜찮아.


그래, 나는 쉬려고 이 길에 왔다.

더는 나를 혹사시키지 말자. 나를 힘들게 하지 말자. 쉬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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