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서가 깜빡이는 법

프롤로그 - 27년의 기록

by 로그캐빈

방 안이 어두울수록 더 그랬다.

검은 화면 위에서 하얀 커서가 깜빡일 때면, 꺼진 창문에 비친 내 얼굴도 함께 흔들렸다.


전원을 누르면 본체 안쪽에서 낮은 진동이 올라왔다.

모뎀이 '삐익' 하며 세상을 연결하던 시절.

정전기가 오른 CRT 화면 앞에서 손등의 솜털이 곤두섰다.


내가 넣은 만큼만 돌아오는 그 정직한 세계가 좋았다.

틀리면 바로 에러를 뱉고, 맞으면 아무 말 없이 다음 화면을 보여주는 식이었다.

사람의 마음처럼 복잡한 맥락을 읽을 필요도, 어머니의 수선가게 실밥처럼 엉킨 가난을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27년이 흐른 지금, 그 화면 앞에서 본 것들이 떠오른다.

밤새 울던 신입의 얼굴도, 통유리벽 너머에서 끝내 밖으로 나오지 않던 침묵도.


나는 수없이 무너졌고, 그때마다 키보드를 붙잡고 다시 일어났다.

가만히 앉아 무너지기만을 기다리는 건 싫었다.


이제 나는 다시 한번 전원 버튼을 누른다.

이것은 27년 동안 그 커서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의 기록이다.

이번에는 회사를 위한 코드가 아니라, 내가 지나온 시간을 적어보려 한다.

자주 깨지고 자주 엉켰던 지난 시간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다.

월,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