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북한의 소행인가?
글을 쓰고 있는데 컴퓨터가 갑자기 꺼졌다.
윈도의 파란색 종료 화면이 뜨더니... 한글파일을 삼켰다.
자판과 파트너십을 느끼며 오랜만에 물아일체가 되려던 참이었다.
"안녕~ 아까부터 피곤했는데 갑자기 졸음이 쏟아져서
나도 모르게 깜빡 졸았지 뭐니. 나는 이제 쉬어야 할 것 같아.
미안. 아까 네가 나한테 톡톡톡 얘기한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
잘 지내다 갑자기 이별을 건네서 나를 공황장애로 몰아넣었던 옛 애인처럼
친절한 윈도우 씨는, 창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내가 지금까지 한글파일에 부지런히 타이핑하고 있던 문서내용은 어쩔거냐고
항변을 해보지만, 그는 귀가 없고, 설령 듣는다고 해도 후진버튼이 없고,
고로 그에게 자비란 없다.
너의 잘못이 아니다.
이건 분명 농협을 공격했던 북한의 소행이다.
이건 윈도우를 만든 빌게이츠의 소행이다.
이건 한글과 컴퓨터를 만든 김희애 남편, 이찬진의 소행이다.
(왜? 하필 너까짓 꺼에게라고 묻겠지만, 음... 세상의 모든 테러는 이유가 불분명하다)
컴퓨터에게 짜증을 내어봤자 달라지는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어른스러움 덕분인지 짜증이 별로 나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 컴퓨터를 켤 때, 그래도 자동저장이 되어 있지 않을까 약간 기대를 했다.
나이가 들면서 관대해지는 만큼 기억력은 나빠지고 기력은 쇠하므로.
켰을 때, 알았다.
북한은 나에게 관심이 없었고
빌게이츠는 오류없는 컴퓨터를 만들었고
김희애는 자동저장이 되는 프로그램을 만든, 똑똑한 남편과 결혼을 했으며
내 왼손가락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도 부지런히 Ctrl+s를 눌러주고 있었음을.
테러와 감사를 오가는 5분.
인생은 별 것 아닌 일에 분노하고
별 것 아닌 일에 감사한다.
감사하라고 분노를 만드는 거구나.
신비롭다. 인생은.
Ctrl+S를 눌러 오늘의 경험을 가슴에 아로새겨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