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구구글방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연 Jun 02. 2021

[06.01] 커터칼


“나는 이걸로 할래” 소개팅 자리에서 각자의 소지품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남자들이 선택하기로 했다. 주머니를 뒤적거렸더니 만져지는 물건. 커터칼을 책상 위에 올려놨다. 캐릭터 핸드폰 고리, 화장품 팩트, 손거울 등 소지품 사이에서 커터칼은 무심하고 차갑게 놓여 있다. 내 몸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물건이기도 했지만, 나는 위험한 사람이니 쉽게 다가와서 떠나려거든 처음부터 다가오지 말라는 뜻도 내비치고 있었다. “나는 이걸로 할래. 유니크하네. 독특한 면이 있는 사람이 낸 거 같아.” 처음에 자리에 앉을 때부터 눈이 마주치던 남자애가 웃으며 커터칼을 집어 들었다. 왼쪽 소매 끝을 계속 잡아 당기며 손을 숨겼다. 긴장되면 나도 모르게 나오는 버릇이다.    

  

나는 유니크하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호감을 가지다가 세 번 정도 만나면 나가떨어진다. 유니크함의 유효기간은 한달이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보면 주인공 이지안이 “나에게 4번 이상 잘해준 사람은 아저씨가 처음이었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사람들은 순간 반하고 쉽게 호의를 베풀지만 오래가지 않고, 끝내 비난을 하며 돌아선다. “넌 참 이상한 아이다.” 사람들은 칼로 재단하듯 누군가를 평가한다. 흑백, 선악, 명암만 존재하는 것처럼 명확하게 선을 긋고 나를 평가했다. 유니크함과 이상함 사이를 오가며 연애와 사람에 지쳐갈 때쯤 그를 만났다. 공대 남학생의 절반 이상이 입고 있다는 체크 셔츠를 입고, 검은 테의 안경을 쓰고, 점심 메뉴로 학교 식당에서 돈까스 먹었을 법한, ‘윌리를 찾아라’ 속의 배경 같은 사람.      


그 때 나는 대학교를 자퇴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감당하기도 어려웠고 졸업을 한다고 뭘 할 수 있을까 두려웠다.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좁은 원룸에 앉아 있으면 이대로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닐까 싶어 새벽까지 잠이 들지 못했다. 살아 있다는 증거가 필요한 순간, 커터칼로 왼쪽 팔을 그어 피를 내었다. 붉은 피가 흐른다. 붉은 피가 떨어진다. 나는 심장이 뛰고 몸 안에 붉은 피가 흐르는 살아있는 동물이다. 원초적인 본능을 일깨우고 나서야 마음이 가라앉고 잠이 들 수 있었다. 다음날에 보면 팔에는 피딱지가 앉아 있고 쓰라렸지만 한번 습관이 들고 나니 멈출 수가 없었다. 팔에는 길고 가는 여러개의 줄이 나 있어 여름에도 긴팔만 입었다.      


그와 첫 데이트를 하는 날. 예상했던 대로 그다지 재미가 없었고 단조로웠다. 나름 신경써서 코스를 골라온 것 같지만, 얼른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했다. 그런데 그런 데이트가 네 번을 넘었다. 이상하다. 호의는 세 번까지인데... 이상하다.... 그가 숫자를 잘못 세는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매번 똑같이 밥을 먹고 길을 걷고 어색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우리는 별로 친해지지는 않았지만 어제보다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항상 팔짱을 끼고 맞은 편의 상대방을 바라보는 내가 몸을 기울여 이야기를 듣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침에 오늘 날씨를 알려주는 그의 안부인사가 반가웠다.      


그 사이 8월이 되었다. 여름이라 가만히 있어도 목덜미에 땀이 흘렀다. “긴팔이라 더워요.” 민소매를 입은 사람들을 보며 내가 넌지시 말했다. “그럼 소매를 걷으면 되잖아요” “안돼요. 놀라서 도망갈 거에요.” “도망을 왜 가요. 용 문신이라도 있는가 보죠.” 그가 웃으며 되받았다. 무슨 객기였을까. 엄마 앞에서도 절대 보인 적이 없는데... 왼팔을 걷어 올렸다. 그가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바라봤다. 떠나도 하는 수 없다. 모두 그랬으니... 라는 체념의 마음이 올라왔다. “오선지네요. 음표를 그리면 되겠다.” “네?” “오선지니까 거기에 좋아하는 노래를 그려넣는 거에요. 그러면 매번 볼 때마다 그 노래를 떠올리며 행복해지잖아요. 내가 그려줄까요?”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볼펜을 꺼내 팔에 음표를 그려 넣는다.    

  

“어때요? 잘 못부르는데... 다음에 노래도 불러줄게요.” 심장이 쿵쾅거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흐른다. 견뎌왔고 견뎌왔는데.... 이제는 그려 넣은 음표따라 노래하듯 살아보고 싶다는 기분이 드는 순간이었다.



*키워드로 커터칼을 받고 고심했습니다. 코로나 이후 20대 여성들의 자살율이 40% 이상 치솟을 정도라 사회적 학살이라고 합니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분들에게 제 글이 아주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05.31] 금반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