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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연 May 31. 2021

[05.31] 금반지


비가 오네. 11월의 초입이라 날씨는 쌀쌀하고 비까지 오니 이런 날은 공치기 십상이다. 파고다 공원에 인적이 드물다. 장기나 바둑을 두는 남자들이 없으니 싸움이 오가는 고성도 없다. 비만 주룩주룩 내리는 날. 따뜻한 국밥 한 그릇 먹고 오면  비가 그치려나. 비가 온다고 집으로 그냥 돌아갈 수는 없다. 근면성실함은 어려서부터 항상 칭찬으로 받아오던 말이다. “넌 도둑질을 해도 부지런히 할 년이야” 어머니는 내 이름을 평생 부르지 않으셨다. 안아주신 적도 없다. 딸들에게는 냉대하고 무심하셨지만, 말년에는 우리집에서 눈을 감았다. 오빠들은 찾아오지 않았고 예상대로 생활비도 보태주지 않았다. 어머니의 짝사랑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고생이 많았다며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을 했는데, 나는 어머니의 죽음을 예감했다. 평생 손가락에 끼워졌던 금반지를 빼서 내 손에 잡혀 주었는데 반지를 뺀 부분은 하얗게 테두리가 둘러져 있었다. 금붙이에 가려져 평생 햇빛을 보지 못한 살갗. 몇십 년 만에 햇빛을 받는 순간이었다. 어머니의 금반지는 나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다.

나는 파고다 공원의 할아버지들에게 바카스를 건넨다. 나를 두고 세상은 바카스 할머니라고 부른다고 하지. 혼자 벤치에 앉은 할아버지가 있으면 조용히 다가가 “바카스 한병 드시고 쉬었다 가실래요?”라고 묻는다. 좋다고 하면 인근의 여인숙으로 향한다. 대사도 비슷하고 이동경로도 비슷하고 여인숙에서 하는 행동도 비슷하다. 별 것 없다. 젊어서 하나 늙어서 하나 다 비슷하다. 사람 사는 게 별 것 없듯이 늙으나 젊으나 뭐가 그리 다르겠는가. 다만 늙으면 연애하기 어렵고 누구도 만나주지 않으니 3만 원에 박카스를 마시면서 여자를 사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뿐. 세상은 왜 이런 일을 하냐고 손가락질을 하지만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나. 직업일 뿐이다. 이 돈으로 나는 집으로 돌아가서 반찬을 사서 밥을 먹고 월세를 내고, 돈을 조금 남겨두었다가 관절염 약을 사러 약국에도 갈 것이다.

비가 와서 춥고 얼른 집에 가고 싶지만 이대로 공칠 수 없으니 30분만 더 있다 가보기로 했다. 비 오는 날 처마 밑 벤치에 앉아서 멍하니 있던 남자 하나. 나이는 70대 후반 정도로 보이고 행색은 초라해도 얼룩 없이 말끔하게 입었다. 손가락에 굵은 금반지까지 하나 끼고 있으니 돈이 아예 없지는 않아 보이니 다행이다. “바카스 한병 드실래요?”라고 했더니 좋다고 한다. 드디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침대 끝 모서리에 조심스레 앉아 있던 남자는 옷을 벗고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을 안아보는 게 오랜만이야.” 날이 추워서일까 나도 사람의 체온이 반갑다. 그런데 남자의 벗은 몸은 삐쩍 말랐고 손끝까지 차다. 나는 몸을 데우려고 더 꼭 껴안는다. 그리고 약간의 엉김의 시간을 가지는데 남자는 힘에 부쳐서일까 숨을 쉴 때마다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헐떡인다. 얼굴을 보니 눈자위는 풀려있고 얼굴은 백지장 같다. “영감님! 영감님 정신을 차려보세요. 영감님. 아이고 어째. 영감님! 사람이 죽게 생겼네. 영감님!” 내가 다급하게 부르자 멀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간신히 말을 한다. “나 사실... 일부러... 파고다에 와서... 기다렸어요. 의사가 몇 달... 못산다고 했는데... 사람을.. 한번... 안아보고... 죽고... 싶었어요. 고마워요.... 나 죽으면... 장례... 치러줄... 가족도 없어요.... 여기... 금반지를 빼서.... 내 장례 좀 치러줘요. 염치없지만... 미안하고 고마워요.”

나는 가만히 그를 안아주었다. 서서히 식어가는 몸을 안고 그의 삶을 생각해본다. 금반지에는 빛나던 인생이 담겨 있겠지. 금반지를 빼고 난 손가락에 하얗게 테두리가 둘러져 있다. 영혼의 테두리. 빛나는 것의 이면은 여리고 아프다.



*어제 친구와 종로 3가의 파고다공원 쪽을 지날 때, 친구가 '금반지'로 글을 써달라던 찰나 눈앞에 풍경들을 머릿속에 담아두었다가 글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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