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학습.
나는 때때로 의구심이 들었다.
알고 싶었다.
용기내어 말해 본 적 있다.
아주 놀란 모습이었고,
내게 칼날 같은 말이 돌아왔다.
하지만 나도, 그도 진심이었고
결국 미안한 마음 뿐이었다.
스스로의 감정에 대해 의심해본 적 있는가.
혹은 궁금해본 적.
한 때 나는, 나 그 자체를 의심했다.
감정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왜 사람들은 저런 표현을 하는가.
나는 왜 똑같이 행동하지 않는가.
순간들이 쌓이며
나는 관찰하고 따라하기를 택했다.
그것이 사회적 동물로서의
역할이라 판단했기 때문에.
다 이루어질지니 라는 드라마를 보며
새삼 잊고 있던 나를 떠올리게 되었다.
'온전히 나만의 즐거움'
이것을 이해하고 있다면 축복일 것이다.
본디 스스로 비판적이고 부정적이기에
즐거움 이라는 단어 자체를 멀리해왔다.
동시에 나는 설계된 몸이기에
기쁨도 알아야만 했다.
알 지 못하는 것을 알기 위해선,
보고 따라하는 방법 뿐이었다.
나는 다른 이들의 기쁨을 베꼈고,
그들의 즐거움을 염탐했다.
부디 나의 몸은 느꼈기를.
만족은 못해도 채워지기를.
용기를 내었을 때,
나는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너와 함께 있으면 즐거움을 느껴.
하지만 나로 인한 것인지, 너로 인한 것인지 모르겠어.'
답변은 이러했다.
'무슨 소리야. 니가 느끼는데 왜 몰라.
그럼 내 감정을 따라하면서 척 한거야?'
나도, 그도 모두 진심이었다.
순수하고 본질적인 그 자체로.
결과적으로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나는 이 때, 적잖은 충격을 받았고
다시는 말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나의 행동은 상황을 고려한 판단 하에
표현하기로 정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이해하지 못한 채 이어진 대화는 끝을 맺었다.
'나는 모르겠다. 널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린 친구고 나는 나대로 널 대하겠다.'
미안한 마음으로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는 내게
건네준 말이었다.
내 삶을 바꾼 순간이었다.
나조차도 이해 못 하는 나를,
기꺼이 짊어지겠다고 한다.
거창한 이유 없이, 그냥.
이유는 스스로 찾겠다고 한다.
어쩌면 그저 믿고 결정하는 것이
나를 이루는게 아닐까.
잊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감사하게도 연을 이어가고 있다.
아무래도 상관 없다.
나에게는 결국 나를 받아들이게 한 은인이다.
온전히 모든 것을 이해하는 일은 없다.
정말 확신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가.
나는 고마운 존재를 통해 간접적으로 느꼈다.
돌고 돌아, 나는 내 스스로 정한다는 것을.
완벽하지 않으면 어떤가.
이해할 수 없으면 어떤가.
믿기로 하고,
그렇게 대하기로 하면 된다.
그 뿐이다.
나는 오늘 기쁘기로 정했다.